SETEC에서 열린 2017 서울국제불교박람회

불교박람회가 있다는 걸 최근에야 알게되어 처음 가보게 되었다. 국제불교박람회라니! 설레이는 마음으로 도착!

박람회는 2017.3.23(목) - 3.26(일) 까지 열렸고 관람시간은 10:00-18:00 였다.

부지런히 갔는데도 11시쯤 도착했다. 생각했던 것 보다 사람이 붐비지 않아서 쾌적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

엄마랑 같이 가려고 일찍이 사전등록을 해놓았다.

1관에 들어서자마자 달려가 보았던 쓰리디 라이트!! 이거 부처님 등 정말정말 사고싶었는데.....

기계가 라이트를 인쇄하듯이 만드는 모습이 무척 신선했다. 구매를 하지 않았는데도 열쇠고리(같은 것을)를 두 개나 주셨다.

선물 할 염주를 몇 개 구입했는데, 사진 보니 아 이거 뭐지 여기가 더 다양하잖아? ㅋㅋㅋ

여기다가 향초 켜놓고 은은하게 차 마셔도 좋을 것 같으다.  :-)

박람회에 처음 온 서울불자1은 그저 모든 작품들이 신기하고 황홀해보일 뿐입니다요.

인스타를 통해 이미 구경했던 청년불교미술작가전 '붓다의 일상' 이다.

솜씨 좋으신 금손 비구니 스님들과 불자분들의 작품.

녹색 배경의 부처님과 코끼리가 가장 인기가 많았는데, 작품들이 하나같이 전부 멋있었다. 색감도 너무 예쁘다!!!!!!!!!

예쁘고 멋드러진 작품들도 많고 탐나는 것들이 많았다. 눈이 넘나 즐거우신거다 ♬

고려불화 '수월관음도' 고려불화는 한 점만 보아도 보살이 된다는데 나도 보살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겠구먼! :D

(수월관음도는 다음에 퍼즐맞추기 도전해보아야겠다. :-) 그리고 주변에 선물해야지)

좋다기에, 손쉽게 구할 수 없으니까 화분도 하나 구매.

BTN 방송차량에 들어가서 관람도 할 수 있었다. 잽싸게 차에 올랐는데 들어오는건 나뿐...ㅋㅋㅋㅋㅋㅋㅋ

직접 방송기기를 만져보는 컨셉의 사진을 찍으려고 폼을 잡고 있었는데 친절하신 BTN 직원분께서 사진을 찍어주시겠다고 하셔서 얌전히 의자에 앉아서 사진을 찍었다.

BTN 카톡 친구 맺으면 무료로 인화도 해준다.

고려대장경판 체험도 해보았다.

해인사 스님께서 도장찍어주시면 합장인사 공손히하고 감사하게 받아가면 된다. _()_

조금 있으니 혜민스님 등장하셨다. 물론 안봤다 :-) 다른 것들 구경하느라 바빠서

사진은 없지만 중간에 송준스님도 뵈었다.

주지스님께 선물하려고 조청 세트를 구매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알게되었다.

그 뒤로 인스타그램을 통해 사진으로만 뵈었던 스님을 직접 만나게 되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인자함이 풍기는 스님의 모습이 좋았다.

소중한 인연 :D

경락차크라 받는중

엄마는 손바닥에

나는 손등에

비구니스님들께서 직접 만드신 장아찌주먹밥? 맛나요!!!

1-3관을 모두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안에서도 계속 먹고 마셨는데 밖에 나와서도 이것저것 시식중

성진스님도 잠깐 뵙고!

2시간이면 다 둘러보겠지. 구경만 하다 와야지. 했는데 시간은 어느새 4시간이 훌쩍 지나고

집에오니 한아름이었다.

무료로 나눠주는게 더 많았던 것 같다.

데려온 아이들 중 최애템은 단연 코끼리!!!!!!

맘에드는 엽서. 이건 액자로 보관해야겠다. 그리고 상원사도 가보고 월정사 템플도 꼭 가야겠다.

내년에도 볼거리 먹거리 더 풍성하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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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번뇌의 경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없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어떻게 지냈을까?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다가 무엇으로 변했을까? 나는 미래세에 있을까? 나는 미래세에 없을까?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될까? 나는 미래세에 어떻게 지낼까?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되어 무엇으로 변할까? 또는 현세에 이것에 대해 의심한다. 나는 있는가? 나는 없는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있는가? 이 존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이와같이 이치에 맞지 않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여섯 가지 견해 가운데 하나의 견해가 생겨난다. '나의 자아는 있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난다든가 '나의 자아는 없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난다든가 '자아에 의해서 자아를 지각한다.' 라는 견해사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난다든가 '자아에 의해서 무아를 지각한다.' 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난다든가 '무아에 의해서 자아를 지각한다.' 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난다. 또는 이와 같이 '나의 이 자아는 말하고 느끼고 여기저기서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를 체험하는데, 그 나의 자앙는 항상하고 항주하고 항존하는 것으로 변화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라는 견해가 생겨난다.

*여섯 가지 견해 가운데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의 단순한 이율배반을 나타낸다.

 

- 맛지마니까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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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 가지 새김의 토대

 1) 몸에 대한 관찰

 2) 느낌에 대한 관찰

 3) 마음에 대한 관찰

 4) 사실에 대한 관찰

"걸어가면 걸어간다고 분명히 알거나, 서있으면 서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앉아있다면 앉아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누워있다면 누워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신체적으로 어떠한 자세를 취하든지 자세를 그대로 분명히 안다."

2. 네 가지 바른 노력

 1) 방지의 노력

 2) 버림의 노력

 3) 수행의 노력

 4) 수호의 노력

3. 네 가지 신통의 기초

 1) 의욕의 집중에 기반한 노력의 형성을 갖춘 신통의 기초

 2) 정진의 집중에 기반한 노력의 형성을 갖춘 신통의 기초

 3) 마음의 집중에 기반한 노력의 형성을 갖춘 신통의 기초

 4) 탐구의 집중에 기반한 노력의 형성을 갖춘 신통의 기초

4. 다섯가지 능력

 1) 믿음의 능력

 2) 정진의 능력

 3) 새김의 능력

 4) 집중의 능력

 5) 지혜의 능력

5. 다섯 가지 힘

 1) 믿음의 힘

 2) 정진의 힘

 3) 새김의 힘

 4) 집중의 힘

 5) 지혜의 힘

6. 일곱 가지 깨달음 고리

 1) 새김의 깨달음 고리

 2) 탐구의 깨달음 고리

 3) 정진의 깨달음 고리

 4) 희열의 깨달음 고리

 5) 안온의 깨달음 고리

 6) 집중의 깨달음 고리

 7) 평정의 깨달음 고리

7. 여덟 가지 고귀한 길

 1) 올바른 견해(정견) - 바르게 보기

 2) 올바른 사유(정사유) - 바르게 생각하기

 3) 올바른 언어(정어) - 바르게 말하기

 4) 올바른 행위(정업) - 바르게 행동하기

 5) 올바른 생활(정명) - 바르게 생활하기

 6) 올바른 정진(정정진) - 바르게 정진하기

 7) 올바른 새김(정념) - 바르게 깨어있기

 8) 올바른 집중(정정) - 바르게 삼매하기

 

- 맛지마니까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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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행자 이야기

붓다 2017. 3. 7. 01:24

 

옛날 경상도의 어느 절 뒷산에 곰이 한 마리 살았다. 이 곰은 가끔 절 마당에 내려와 스님들이 주는 누룽지를 얻어먹기도 하고 절 마당을 어슬렁거리며 다니기도 했다. 자비로운 스님들은 이 곰을 잘 보살펴 주었는데, 곰이 원래 흉내를 잘 내는 짐승이라 그런지 스님들이 참선을 하고 있으면 곰도 마루에 올라앉아 참선하는 흉내를 내곤 했다.

어느덧 곰은 수명이 다해서 죽게 되었는데, 인연의 힘으로 사람의 몸을 받아 그 절에 다시 와서 살게 되었다.  전생이 곰이었던 탓인지 생김새가 꼭 곰을 닮아서 스님들은 그를 곰 '웅'자를 써서 웅행자라고 불렀다. 이 웅행자는 심성이 착하고 기운도 세서 절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절의 후원에서 공양을 짓던 웅행자는 아궁이의 불이 자신의 짚신에 옮겨붙는 줄도 모르고 깊은 염불삼매에 들어 있었다. 

마침 지나가던 조실스님이 '미련한 곰아, 네 발이 타는 줄도 모르느냐' 하시며 부지깽이로 머리를 쳤다. 순간 웅행자는 자신의 전생과 불법의 큰 공덕을 확연히 깨닫고 눈물을 흘리며 법당을 향해 절을 했다. 그리고는 기쁨에 넘쳐 이렇게 외쳤다.

 "천번 나고 만번 죽음이여, 이 일을 언제야 다할 것인가.  가고오고 오고가면서 무거운 짐만 더하더니 오늘 아침 비로소 대장부의 큰 일을 마쳤구나."

 그후 웅행자는 정진을 거듭하여 선지식이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웅행자처럼 불교에서 설명하는 인간은 인과의 존재이며 무시 이래 세세생생의 숙업체(宿業體)이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숫타니파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간은 업에 의해 존재하고 사람들도 업에 의해서 존재한다.  모든 생명있는 것들은 업에 매여져 있다.  마치 소가 끄는 수레가 밧줄에 매여 있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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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수스님 수행이야기 
 
땅 위 봉암용곡엔 물이 흐르고, 하늘엔 희왕산을 넘어온 구름들이 흐른다. 
 
사시사철 산문을 봉쇄하고 참선 정진하는 봉암사 납승의 발걸음 또한 날래다. 
 
머무르지 않은 떠돌이 괴각승 혜수의 그림자가 아닌가. 
 
이 인근 문경 농암에서 1940년(추정)에 태어난 혜수는 16살에 오대산 상원사로 출가했다. 
 
이곳 봉암사 희랑대 토굴 등에서 잠시 정진하기도 했지만 그는 정처 없이 전국을 떠돌았다. 
 
그러다 80년대 초 불과 40여 살로 입적했기에 그를 기억하는 사람조차 거의 없다. 
 
그는 늘 선방에서 안거가 끝나면 바랑 하나 메고 곧장 길을 나섰다. 
 
한 곳에 이틀도 머무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양말이 흘러내릴 정도로 황새처럼 가는 다리로 날 듯이 산을 탔다. 
 
1년이면 그렇게 전국의 산과 절을 세바퀴씩 돌 정도였다. 
 
그와 몇 차례 결제를 함께 했고, 이곳 희랑대 토굴에서 정진하던 그를 지켜본 실천불교승가회 의장 효림 스님은 혜수를 '이 시대 마지막 괴각승'으로 기억한다. 
 
'괴각'이란 엉덩이에 뿔난 소 처럼 괴팍한 승려를 일컫는 말이다. 
 
상원사에선 주지가 절 돈을 착복한 채 대중에게 소홀히 하자 똥을 담아 불전에 올려놓았다가 쫓겨나기도 했다. 
 
그는 외곬수였다. 장부가 문을 두고 돌아갈 수 없다는 그였기에 하루는 함께 만행하던 도반들이 동화사에 앞질러가서 천왕문을 잠가버렸다. 
 
그러나 천왕문 옆은 툭 터져 얼마든지 드나들 수 있었다. 
 
한참이 지나도 혜수가 들어오지 않자 도반들은 화가 나서 '돌아갔는가 보다'며 그냥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길을 나서 천왕문에 나와 보니 혜수는 그 때까지 그대로 서 있었다. 
 
도반들이 사죄했지만 그는 "밤새 서서 참선을 했다"며 태연했다. 
 
다른 사람들은 흉내조차 내기 어려웠지만 혜수는 평소하던 대로였다. 
 
매일 장좌불와한 그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내실 있게 절을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진 강원도 동해 삼화사 주지 원명 스님과 경북 상주 남장사 관도 스님이 입을 맞춘 듯 "이 시대에 찾아보기 어려운 도인"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다. 
 
원명은 혜수와 한겨울에 상원사에서 북대까지 오른 적이 있었다. 
 
오대산은 눈이 많기로 유명하다. 
 
원명은 발목까지 덮는 농구화를 신었다. 
 
그러나 눈에 빠져 눈밭을 걸을 수 없는 털신을 신고 있던 혜수는 아예 신발을 벗어들고 맨발로 걸었다. 
 
원명은 농구화를 신고도 발이 시러워 죽을 것 같았지만 혜수는 맨발로도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리곤 북대에 도착해선 얼음물에 발을 담가 얼음을 빼냈다. 
 
원명은 "육체의 고통정도는 아예 초탈한 모습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는 초인적인 수행력의 결과였다. 
 
혜수가 해인사 강원에 다닐 때였다. 
 
동안거 중 음력 12월 8일 성도절(붓다가 깨달은 날)이 되면 대중들 가운데 희망자들이 모여 일주일간 용맹정진을 했다. 
 
선원에선 괴팍한 혜수의 참여를 거절했다. 
 
그런데 용맹정진 시작 날부터 혜수는 절 어디에서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일주일 뒤 용맹정진을 마친 스님들이 처소로 돌아와 보니 방안에서 구린내가 진동했다. 
 
스님들이 코를 틀어막고 탁자 밑을 보자 혜수가 그 밑에서 결가부좌를 하고 있었다. 
 
그의 다리는 굳어진 채로 펴지지도 않아 병원에 가서야 펼 수 있었다. 
 
일주일간 먹지도 마시지도 자지도 않고 똥오줌도 그대로 누었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육체를 조복 받았다. 
 
혜수는 시력이 나빠 글씨를 읽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데도 "역대 조사들이 안경 쓴 일이 없다"며 안경을 쓰지 않은 채 살았다. 
 
혜수는 대웅전에 있는 화엄 탱화 속 신중의 눈에 바늘을 꽂으며 "진정 이 신중에게 영험이 있다면 이렇게 해를 끼쳤으니 내 눈을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이라면서 그 영험을 실험했다고 한다. 
 
두려움 많은 세인에겐 기도 안 찰 실험이다. 
 
선승인 관도 스님은 "틀에 박힌 격식을 거부하고, 몽둥이로도 과감히 실험을 하는 그런 선승을 남의 눈치나 살피는 세상 어디에서 다시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했다. 
 
혜수는 80년대 초 선방 결제 뒤 남장사를 바람처럼 지나갔다. 
 
그 날 사자평을 넘으며 젊은 선승들에게 혜수는 "선사라면 선사답게 좌탈입망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밀양 표충사에 도착해 객실에서 차를 마시던 중 한 선승이 "그럼 스님은 좌탈입망할 수 있습니까?" 하며 따지듯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혜수는 찻잔을 든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구름이 가듯, 옷을 벗듯 혜수는 그렇게 허물을 벗어버렸다. 
 
사망을 확인하는 경찰도 '앉아 있는 주검'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간첩의 독침을 맞으면 즉사한다는 소문도 있는 때여서 병원으로 옮겨 해부까지 했으나 독침을 맞거나 독극물을 마신 흔적도 없었다. 
 
그가 방장이나 조실이었다면 달마나 육조 같은 조사들이나 하는 것으로 전해진 좌탈입망이 현실로 나타났다며 세상이 요란할 일이었지만, 떠돌이의 법구는 조용히 불태워져 산에 뿌려졌다. 
 
탑도 세워주는 이 없었고, 상좌(제자) 하나 없으니 그를 기리는 제사도 없다. 
 
희왕산의 나무가 소리 없이 물들고 있다. 

 

출처 : 자성불 https://story.kakao.com/ch/jsb7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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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들이여, 나는 행복했고 티끌만큼의 괴로움도 몰랐지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리석은 범부는 스스로 늙어가면서 남이 늙은 것만 보고 자신의 일은 잊은 채 그 늙음을 혐오한다. 자신 또한 늙어가는 몸이다. 아직 늙음을 면할 길을 모르면서 남의 늙음을 혐오해도 되는가? 이는 결코 마땅한 일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내 생각이 이에 미치자 내 청춘의 교만은 산산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병들지 않을 수 없는 몸이면서 다른 사람의 병을 혐오하고, 죽지 않을 수 없는 몸이면서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고 눈길을 돌리는 것은 결코 마땅한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때, 나의 건강에 대한 교만은 산산이 부서지고 생의 교만도 티끌처럼 날아갔습니다.

-유연경(柔軟經)-

 

 

잠시 귀찮은 마음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부처님 말씀을 읽으며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올바른 생각을 하려한다.

정신과 병동 실습 때와 같이 나의 밝고 활력있는 에너지 파장을 어르신들께 나누어 드리는 자비로운 시간들이 되길 발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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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사나 수행의 길

붓다 2017. 2. 19. 01:08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직접적이고 최종적이며 핵심적인 수행법 -거해스님


7 수마를 극복하는 법(졸음을 이기는 법)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허락하신 수면시간은 4시간에서 특별한 경우 6시간 정도이다.
수행인은 졸음에 대해서 좀 더 냉정하고 그 악영향을 깊이 생각해야 된다. 생각하건데, 차라리 망상 피우고 있는 것이 졸음에 의식을 잃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스스로 깨닫고 정진하려 노력하는 기회가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9 여러종류의 마음

"어떠한 실체도 이 심오한 진리의 현상 속에 존재하는 한 영속성을 지니지 아니했다."
'
' 라고 하는 것을 부처님은 거문고나 피리소리에 비유하시었다. 거문고 자체에 소리를 저장해 놓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리가 완전히 없어진 것도 또한 있는 것도 아니되 다만 줄을 튕기는 조건이 있으면 소리는 일어나고 튕기는 조건이 없어지면 소리는 사라진다. 그래서 거문고나 피리소리는 그 소리를 낼 수 있는 조건을 만날 때는 장소나 시간에 구애없이 일어나고 또한 같은 이유로 사라지는 것이다.

10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

부처님 말씀에 "참고 견디는 힘이 곧 열반(성불)을 증득케 한다." 하시었다. 수행 중에 일어나는 어떠한 고통도 중생이 윤회를 통해서 겪는 고통만큼 큰 것이 없기에 이 고통을 끊어버리는 방법은 굳게 참고 견디는 수행을 통해 이루어진다.

34 졸음과 게으름에서 벗어나는 일곱기지 길

목련존자가 출가하여 얼마 되지 않아 수다원과에 들었을 때, 좌선 중 몹시도 졸음에 시달리는 것을 부처님께서 보시고 졸음을 극복하는 7가지 방법을 설법하시어 목련존자로 하여금 아라한과를 증득하게 하셨다.
1.
마음의 관념을 바꾸고 자리와 자세를 바꿔라.
2.
경을 외우고 마음을 새롭게 하라.
3.
자신의 지난 날 힘 있게 정진하던 것을 기억
4.
자신의 귀밑을 몇 번이고 잡아 당겨라.
5.
얼굴과 눈에 찬물을 끼얹어라.
6.
밝은 불빛을 올려다보아라.
7.
자리에서 일어나 경행하라.

42 갓 출가한 비구

어떤 비구나 비구니는 이러이러한 계울은 오늘날 같은 우주시대에 맞지 않으며 시대적 적응성이 없다는 등 여러가지 이유를 내세워 계와 율에 대해서 경시하거나 무시하며 계율을 비난하기까지 하여, 계와 울을 잘 지켜 수도 정진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자신의 불성실을 호도하려는 태도도 없지않다. 계와 율은 부처님의 교법과 생명선이기 때문에 존경하는 신심으로 생활하며 잘 지켜가도록 해야할 것이다.

43 크게 뉘우침

계와 율을 잘 지키고 수행을 열심히 하여 청정하고 덕이 높으며 지혜로운 훌륭한 비구, 비구니가 되면 모든 중생의 의지처가 되고 복밭이 되며 부터님의 제자로서 존경받게 되므로 교단이 존경받게 되고 영광이 쌓이게 되며 성장 발전하게 되어 더 많은 중생들에게 교화의 덕과 이익됨을 배풀어 나가게 될 것이다.

61 견고한 마음과 속박된 마음

수행인이 수행에 전념하다 보면 스스로 마음이 외곬수가 되고 적은 것에도 얽매이게 되며 용서함이 적어 화를 자주 내게 되고 고집을 세우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굳고 경직되며 거칠고 속박된 마음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제63장 두 가지 신심

종교를 가져 믿는데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의 신심이 있다. 첫째는 경전이나 문헌상의 믿을만한 자료를 통하여 일어나는 신심, 둘째는 어떠한 가르침을 의지하여 자신의 실천적 체험을 통하여 일어나는 경우 등이다.

제65장 부처님의 말씀은 입에 쓴 약과 같다

부처님은 자신에 대해서나 담마 즉, 자신의 가르침에 대해서 일반사람들에게 신심을 강제로 강요하지 않으셨으니 이것이 다른 어떤 종교 창시자보다도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으며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떠한 가르침을 통해서라도 모든 번뇌를 제거하고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지니겠다는 결정심이 있어야 만이 부처님의 설법이 자신의 뜻에 계합되어 바른 신심이 나타나게 된다. 

제71장 지혜

신심과 지혜가 균형을 이루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다. 수행인들에게 신심이 강하고 지혜가 없다면 삿된 신심이 일어나게 되어 부처님을 인격적인 스승의 위치보다도 절대적 지배력을 가진 자로 신격화 시켜버린다. 또한 지혜는 넘치고 신심이 없다면 상상력이 넘쳐 스스로의 묘한 꾀에 사로잡히기 쉬우며 교묘한 생각 등으로 선량한 사람들을 속이고 현혹케 하며 삿된 길로 인도하여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선량하지 못한 생활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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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거사와 승만부인 

 
석가모니 부처님은 깨달음을 통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세상의 모든 속박을 끊어 집착이 없는 완전한 자유인이 되었다. 
 
불교에서의 깨달음은 항상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되어 능동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나아가 '모든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유행하라'는 부처님의 전도선언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끊임없는 자비행을 실천해야 한다. 
 
자비행이야말로 나와 타인에게 이익이 되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지혜와 자비는 불교의 양대 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부파불교 시대에 출가수행자가 자리(自利) 중심의 깨달음에만 전념하고 자비행의 실천을 등한시하자 일체중생에 대한 보편적 깨달음과 중생구제를 강조하는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대승불교 운동이다. 
 
재가불자인 유마와 승만은 출가자 중심 불교서 벗어나 대승불교 진의를 밝힌 인물이다. 
 
계율 지키며 부단히 정진하면 모두 성불할 수 있음을 입증하였다. 
 
무아, 무상에 대한 자각 있으면 다른 존재와 깊은 상생이 가능하다. 
 
대승불교 운동은 붓다에 대한 신앙을 중심으로 붓다의 덕을 찬탄하고, 그 자비의 힘으로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대승불교 운동을 뒷받침할 많은 대승경전이 제작되었다. 
 
이들 경전에서는 공(空) 개념의 이해와 실천, 이타행을 실천하기 위한 이상적 인간상인 보살사상, 법신, 보신, 화신이라는 삼신(三身)사상, 중생들은 누구나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깨달음의 보편성을 주장하였다. 
 
깨달음의 보편화는 출가자뿐만 아니라, 재가자들에게도 성불의 가능성을 열었고, 이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하는 경전으로 '유마경'과 '승만경'이 제작되었다. 
 
이들 경전은 재가자인 유마거사와 승만부인이 주인공이 되어 출가자 중심의 왜곡된 불교를 비판하고, 대승불교의 진의를 밝혀 재가자가 불교를 어떻게 신앙하고 어떻게 일상생활화 해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다. 
 
즉 재가자라도 스스로 계를 지키고 수행 정진한다면 깨달음의 세계에 이를 수 있음을 천명하고, 더 나아가 중생구제를 위한 적극적인 보살행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유마거사는 세속에 있으면서도 대승의 보살도를 성취하여 출가자와 동일한 종교 이상을 실현하며 살고 있다. 
 
그는 재가에 머물지만 부처와 같은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었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중생과 함께하는 참된 보살이다. 
 
그렇지만 그는 깨달음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세속의 온갖 영욕에 대해 희로애락을 내지 않고, 선정과 지옥을 구분하지 않고, 생사 속에 있으면서 중생을 구제하는데 매진한다. 
 
승만(勝)부인은 부처님 앞에서 열 가지 서원과 세 가지 큰 서원을 일으키고, 정법(正法)의 유지와 일승, 여래장사상의 대방편을 널리 전개시키기 위한 법을 설한다. 
 
일승! 여래장사상은 일체 중생들이 모두 깨달음의 가능성인 불성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재가자들도 진리를 추구하고 계를 지키고 수행을 철저히 한다면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승만부인은 이같이 부처님의 진실한 공덕을 찬탄하고 선근으로 정법을 유지하고 선을 닦은 공덕으로 장차 보광여래(普光如來)라는 부처가 될 것임을 수기 받는다. 
 
유마거사와 승만부인의 궁극적인 목적은 부사의한 깨달음을 얻어 완전한 자유인의 경지에 도달하여 자신의 주인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자유인은 자신의 본성을 실현한 사람으로 시비선악의 오염된 세간에도 물들지 않으며, 나아가 오염된 세간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이다. 
 
유마거사가 보여주는 무애자재한 활동은 바로 참 자유인의 전형으로 그의 중생에 대한 연민과 구제활동도 여기서 나온다. 
 
우리들이 마음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에 의해 나와 남을 분별하고, 대상을 실체시하여 그것에 붙잡혀 있는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유마거사는 출가와 재가, 보리와 번뇌, 부처와 중생, 정토와 예토라는 이분법적 구분으로는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없고, 불이(不二)의 절대 평등의 경지에서만 자유가 가능하다고 하였다. 
 
절대 평등의 경지에서 보면 현실의 국토가 바로 불국토이다. 
 
우리들은 어리석음, 탐욕, 성내는 마음 등 번뇌의 고통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정토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보살의 자비행은 바로 번뇌에 싸인 이러한 중생들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다. 
 
일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차별 없는 평등심과 일체 중생을 가엾게 여기는 대비심을 가져야 한다. 
 
유마거사는 '중생들이 병이 났기 때문에 자신이 병이 났고, 중생들의 병이 나으면 자신의 병도 나을 것이다'라며 중생과 자신이 하나, 즉 동체대비임을 강조한다. 
 
그것은 중생에 대한 사랑이다. 
 
중생에 대한 사랑 때문에 보살은 악취에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대비심을 일으켜 스스로 생사윤회에 들어간다. 
 
'유마경''승만경'에서는 진리의 추구, 자기 수행의 일상화, 중생에 대한 자비의 실천, 정법의 수호, 불교의 생활화 등이 불교 신앙의 핵심임을 말해준다. 
 
일상의 삶에서 자기 수행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 간직하고 있는 여래의 성품을 자각하고, 계율의 준수를 통해 번뇌를 불태우고 선(善)을 실천해야 되며, 무주심(無住心)에 의한 무집착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평등심과 자비심에 근거한 사회연대의식으로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 
 
무주심에 의해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일체가 무아이고 무상, 즉 공(空)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존재가 무아이고 삶이 무상하다고 하여 현실적인 우리들의 존재와 삶이 의미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아와 무상을 자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번뇌,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 삶의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평등심과 자비심에 근거한 사회연대의식을 가질 수 있으며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공생과 상생을 말할 수 있다. 
 
일상의 삶에서 불교를 생활화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세계를 믿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연기의 원리와 진리를 믿음으로써 얻어지는 공덕을 믿는 것이다. 
 
불교도들의 진정한 행복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행하는 것에 있다. 
 
그런데 우리들은 사회의 비리나 불행을 광정(匡正)하는데 무관심하고 무능하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불교신앙 형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보다는 부처님의 신비적인 가피력을 믿고, 복을 비는 것에 치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유마거사나 승만부인이 주장하고 있는 정법의 지혜를 얻고, 정법을 교시하며, 정법을 호지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유마거사가 중생과 자신이 하나이고, 중생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임을 강조하듯이 불교도들도 이웃의 아픔을 진정 자기의 아픔으로 여기고 이웃과 함께 하면서 그들을 구제하는 자비행을 실천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들의 현실적인 삶 속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자신들의 삶 대부분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상관없이 살아가면서 참선이라든가 염불을 통해 부처를 이루고자 하는 자기 이익 중심의 잘못된 신앙 형태를 우리들은 보이고 있지 않는가! 
 
일상에서 불법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서원이 필요하다. 
 
재가자였던 승만부인이 처음 불교에 귀의할 때 세웠던 10가지 서원이 그 모범이 될 수 있다. 
 
승만부인은 계를 지키고, 거만하고, 성내고, 질투하고, 인색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가난하고 곤궁한 사람에게 보시하고, 사섭법으로 중생을 거두고, 질병 등으로 고통 받는 중생들을 모두 구제하고, 살생, 살인 등 파계하는 자를 정법으로 교화하고, 정법을 섭수하여 잊지 않겠다고 서원하였다. 
 
이 서원을 바탕으로 승만부인은 진리 추구와 수행, 중생구제, 정법수호를 말하고 있다. 
 
우리 불교도들도 불법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키고 이룰 수 있는 서원을 바르게 세우고, 그것을 생활화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자신의 현실의 삶을 바꿀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이 세상을 청정국토로 만들 수 있다. 
 

출처 : https://story.kakao.com/ch/jsb7888 (자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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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란 무엇을 뜻하는가 -법륜스님

사람은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저마다 다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실제의 삶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행복하고 싶지만 현실은 행복하지 않고,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하지만 그 권리를 행사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각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행복하지 않다고 하는 사람에게 제가 '무엇이 문제인가요?' 라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아이가 말을 안 들어서 괴로워요', '남편이 매일 술 마셔서 남편 때문에 괴로워요', '직장 상사가 매일 화를 내서 괴로워요' 이런 이유들을 대답합니다. 
 
이렇게 자기의 괴로움을 모두 남 탓이라고 해요. 
 
이럴 때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아이가 내 말을 잘 들어야 하고, 남편이 술을 안 마셔야 하고, 직장 상사가 화를 안 내야 합니다. 
 
이 말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행복하다는 뜻이지요? 
 
"네!" (청중) 
 
그런데 이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될까요? 만약 원하는 대로 되어야 행복하다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괴로울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원하는 대로 될 때는 즐거웠다가 또 원하는 대로 안 될 때는 괴로웠다가 합니다. 
 
즉, 즐거움과 괴로움 사이를 왔다 갔다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윤회(輪廻)'라고 합니다. 
 
죽어서 욕심이 많으면 돼지로 태어나고, 미련하면 소로 태어나고, 독한 마음을 먹으면 독사로 태어나는 것을 윤회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욕구가 충족될 때 즐거워하고, 충족되지 않을 때 괴로워하는, 이 고와 락 둘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을 윤회라고 하는 겁니다. 
 
욕구를 따라가면 반드시 과보(果報)가 생깁니다. 반면 욕구를 억제하면 스트레스가 쌓여요. 
 
예를 들어, 화가 난다고 화를 내버리면 주변 사람이 나를 떠나는 등 그에 따른 과보가 생깁니다. 
 
그렇다고 화를 안 내겠다고 참으면 이번에는 내가 스트레스 받아요. 그러니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입니다. 
 
대개 우선 성질대로 했다가, 그래서 미움을 받게 되면 그 다음에는 참는 방향으로 갑니다. 
 
그런데 참는다고 해봐야 두 번밖에 못 참고 세 번째에는 터집니다.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하면서 터지거나, '이게 한두 번도 아니고!' 하면서 터지고 맙니다. (청중 웃음) 
 
그래서 세 번을 잘 못 넘겨요. 마음먹은 일도 3일을 잘 못 넘긴다고 해서 '작심삼일'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렇게 두 번 참았다가 세 번째 못 참고 터뜨리고 나면 그 부작용이 크니까 '다시는 안 해야지' 하고 후회하고 다짐합니다. 
 
그 다짐으로 참다가 또 언젠가는 터뜨리고 후회하고, 터뜨리고 후회하고를 되풀이 하게 됩니다. 
 
그러니 어떤 욕구가 일어날 때에는 따라가거나 참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알아차릴 뿐'이어야 해요. 
 
'아, 지금 나에게 이런 욕구가 일어나는 구나' 하고 그 욕구를 알아차리면, 거기에 끌려가지도 않고 억제하지도 않게 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욕구와 마주치면 대개 따라가든지 참든지, 두 가지의 길 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가령 명상을 하다가 다리가 아프면 다리를 펴든지 참든지 둘 중 하나를 해요. 
 
그런데 '알아차림'이라는 것은 그렇게 다리에 통증이 생길 때 '다리에 통증이 있구나'하고 통증을 느끼고 알아차리는 거예요. 
 
통증이 싫다고 다리를 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통증을 억제하지도 않는 거예요. 
 
물론 현실에서는 잘 안 됩니다. 그래서 연습이 필요한 거예요. 
 
이렇게 욕구에 끌려가지도 않고 욕구를 참지도 않는 제 3의 길이 '중도(中道)'입니다. 
 
욕구를 따라가는 쾌락주의도 아니고, 욕구를 억제하는 고행주의도 아닌, 이 새로운 길이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중도'예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제자들에게 하신 첫 번째 말씀도 '수행자는 쾌락의 길을 가도 안 되고, 고행의 길을 가도 안 된다. 양 극단을 버리고 중도의 길을 가라' 였습니다. 
 
이런 중도의 길은 즐거움과 괴로움을 윤회하지 않는 지속가능한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기분이 좋을 때 마음이 들뜨나요, 가라앉나요? 
 
"들떠요." (청중) 
 
화가 나도 마음이 들뜹니다. 기분이 좋을 때나 화가 날 때가 사실은 같은 거예요. 둘 다 마음이 들뜬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 둘이 계속 되풀이 되는 거예요. 반면 알아차림은 마음이 고요한 상태입니다. 
 
좋다고 들뜨지도 않고, 싫다고 가라앉지도 않는 상태예요. 
 
그런데 대개 그런 경지를 체험하지 못한 채, 기분이 좋아서 들뜨는 것을 행복한 상태라고 생각하고 그 상태가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데 그런 상태는 계속 유지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면 행복한 것이다'라는 가치관을 갖고 있는 한, 우리는 영원히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저 고(苦)와 락(樂)이 되풀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가치관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이 가치관의 전환을 다른 말로 출가(出家)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까지 살아온 집의 가치관, 즉 고와 락 중, 락만을 바라는 가치관을 버리는 것입니다. 
 
락만 갖기를 바라지만 락에는 필연적으로 고가 따릅니다. 
 
그래서 괴로울 때는 집을 나갔다가 또다시 편안함을 그리워하면서 집으로 들어오고, 그렇게 나갔다가 들어오고를 반복합니다. 
 
이런 건 가출이라고 해요. (청중 웃음) 
 
'고와 락의 되풀이'를 불살라 버리는 것, 그런 기존의 가치관을 집이라고 대변하여 '집을 불살라 버리는 것'을 '집을 떠난다, 출가했다'라고 표현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절에 들어와도 스님이 볼 때에는 열에 아홉은 출가가 아니라 가출을 하는 것 같아요. (청중 웃음) 
 
집이 싫어서 나왔다가 절에서 살기 힘들어지면 다시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돌아갔는데 귀찮아서 못 살겠으면 다시 나옵니다. 이렇게 나왔다 들어갔다가 하는, 이런 오고 감은 '가출'입니다. 
 
여러분들은 괴롭다고 할 때 대개 '무엇 때문에 괴롭다'라고 말하는데, 그 가치관을 붙들고 있는 한 지속가능한 행복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탓을 하기 시작하면 여름에는 더워서, 겨울에는 추워서, 봄에는 알레르기가 있는데 꽃이 펴서 괴롭다는 등 날씨부터 온갖 것을 다 탓하고 살게 됩니다. 
 
그런데 관점이 탁 바뀌면 여름에는 수영을 할 수 있어서 좋고, 겨울에는 스키를 탈 수 있어서 좋고, 봄에는 꽃구경을 해서 좋고, 가을에는 단풍 구경을 할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날씨에 따라 내 마음이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에 긍정적으로 대응을 하게 됩니다. 
 
즉, 욕구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니 훨씬 더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거예요. 
 
그런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 출가이지, 꼭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는 것만이 출가가 아닙니다. 
 
자기의 기존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의 길로 나아간다면 출가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아무래도 세속에서 살면 자꾸 옆 사람과 비교해서 시류를 따라가기 때문에 이렇게 되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초심자일수록 세속으로부터 일정 기간 격리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다음에는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을 나눌 필요가 없어집니다. 
 
어디에 있어도 늘 알아차림을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법륜 스님은 왜 출가하셨나요? 출가하실 때 주변 사람들의 반대는 없었나요?" 
 
저는 원래 과학자가 되는 게 꿈이였어요.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 때였어요. 
 
현재 저의 스승님이 되시는 불심 도문 스님께서 저를 부르셨어요. 이 분은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하시면 3~5시간씩 말씀을 하신단 말이죠. 
 
마침 다음 날 시험이 있었는데, 그 날은 스님께 붙잡히면 큰일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스님께서 부르시자마자, 제가 "스님, 저 오늘 바쁩니다" 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스님께서 '어, 그래?" 하시더니 "너 어디서 왔어?" 하고 되물으셨어요. 
 
그래서 "학교에서 왔습니다" 라고 대답했더니 "그 전에는?" 하고 또 물으셨어요. 
 
그렇게 "그 전에는?" 하는 문답을 계속 주고받다가 결국 제 대답이 "어머니 뱃속에서 나왔겠죠" 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 다시 "그 전에는?" 하고 물으셨어요. 그래서 제가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하고 대답했지요.

그랬더니 스님께서 이번에는 "너 지금 어디갈거니?" 하고 물으셨어요.

그래서 "도서관이요" 하고 대답하니 "그 후에는?" "학교요" "그 후에는?" "집이요"

이렇게 "그 후에는?"하는 문답을 계속 주고받다가 결국 제 대답이 "그 후에는 죽겠죠" 까지 갔습니다.

이번에도 스님께서 "그 후에는?" 하고 한 번 더 물으셨어요.

그래서 제가 "몰라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스님께서 갑자기 "야 이놈아,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놈이 바쁘기는 왜 바빠" 라고 벽력같이 고함을 치셨어요.

요점은 이렇습니다. 스님께서 부르시자마자 제가 바쁘다는 말씀부터 드렸잖아요. 바쁘다고 하면 적어도 어디로 갈지는 알고 바빠야 하는데 스님께서 질문 몇개를 던지고 나니 제 대답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고, 또 결국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고 나온 거예요.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이치에 맞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저한테도 이 질문이 남게 되었어요. 분명히 내 입으로 바쁘다고 했는데, 왜 바쁜지 물어보니 또 내 입으로 모른다고 했어요. 그래서 스님께 "그걸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고 여쭈었더니 도리어 "어떻게 그걸 모르고 살아가느냐? 라고 하세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습니까?" 했더니 "절에 들어와" 라고 하셔서 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어느 날 저희 어머니꼐서 제가 절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절로 찾아오셨어요. 오셔서 스님께 울고불고 항의를 하신 거예요.

어머니 말씀은 고등학교라도 졸업을 하면 그 때 데려가시지 어쩜 이렇게 어린 아이를 데려가느냐는 요지였어요. 그랬더니 스님께서 그러셨어요.

"보살님!" "네" "이 아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아요?" "아니요" "저는 알아요. 그러면 아는 사람이 아이를 지도해야겠어요, 모르는 사람이 지도해야겠어요?"

"아이고, 그야 아는 사람이 지도해야죠"

이렇게 어머니께서는 스님께 일단 기가 꺾이셨어요. 그런데 어머니도 궁금하셨을 거잖아요? 그래서 어머니께서 "얘가 어떻게 되는데요?" 하고 물으셨어요.

그랬더니 스님께서 "이 아이는 단명해요" 라고 딱 한마디만 하셨어요. 단명한다는 말은 일찍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는 너무 놀라서 "아이고, 그럼 스님 아들 하세요" 하고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저는 집안 문제가 이렇게 잘 정리되었습니다. (청중 웃음)

저는 도를 이루겠다고 출가를 한 것도 아니고, 대학을 가려고 출가한 것도 아니고, 실연을 당해서 절에 들어온 것도 아니고, 돈을 벌려고 들어온 것도 아니었어요.

인생이 궁금해서 들어왔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어머니와의 정을 끊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그러다보니 절에 들어와도 신통력 같은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오히려 신비한 것은 왜 우리가 심리적으로 신비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탐구를 해봤어요.

그리고 결국 신비하다는 생각은 우리가 어떤 현상에 대해 왜 일어나는지 원인을 모를 때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예를 들어, 비행기가 날아가는 것은 신기해하지 않는데 앉아있는 사람이 갑자기 뜨는 것은 신기해하잖아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원리를 모르기 때문이예요. 인간에게 두려움은 왜 생길까요? 마찬가지로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즉, 무지(無智)때문에 생겨나는 거예요.

이렇게 탐구하는 자세로 부처님의 일생이나 부처님의 법문을 공부하면, 붓다야 말로 모든 것에 대한 탐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처음에는 조금 억지로 출가한 면이 없지 않은데 시간이 갈수록 적성에 맞았어요. (청중 웃음)

 

-법륜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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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암

일상 2017. 2. 7. 00:23

2016.11.5

천장암

수월스님을 생각하며 방문한 곳.

 

어마무시한 오르막길

이런 곳에서 스님들께서 수행을 하시고 마음의 안락을 얻으셨구나.

저도 청산이 좋지만 왜 세속의 것들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걸까요

경허스님 방

이 작은 방은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 경허선사가 약 1년 동안 수행했던 방이다. 이 방에서 깨달음을 원만하게 이루셨다고 해서 원성문이라 한다. 1평이 안되는 작은 크기인 이 방에서 경허스님은 한 벌 누더기 옷으로 모기와 빈대에 물려 온 몸이 헐어서 벗겨지는 치열한 수행을 하셨다.

 

방문을 열었는데 문을 닫으면 산소도 부족할 것 같다. 나라면 고행이었을 것 같다.

범접할 수 없는 경지. 부처님 법 마음 심자 하나에 달렸다는데 나도 열심히 달려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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