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잠브라함 스님

붓다 2018. 5. 2. 23:11

 

"UFO의 존재에 대해서 불교에서는 그들이 당연히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외계인의 존재에 대해서도 부처님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지구 밖 다른 무한 우주 법계에 인간처럼 생긴 혹은 인간과 닮지 않은 모습의 무한한 생명체들이 존재하고 있고 그들이 우리가 사는 세계를 방문하기도 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하지만 외계인들은 현명합니다. 이 무명 속에 빠진 탐진치에 물든 지구인들에게 함부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인간이 아직 자신들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깨달음과 완전한 행복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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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법계진언

옴 남(7번)

 

공양계(공양하고 찬탄함)

공양시방조어사 연양청정미묘법 삼승사과해탈승 원수애납수 원수애납수 원수자비애납수

진언권공(진언으로 공양을 권함)

향수나열재자건성 욕구공양지주원 수장가지지변화 양유삼보특사가지 나무상주시방불 나무상주시방법 나무상주시방승(3번)

무량위덕자재광명 승묘력 변식진언

나막 살바 다타아다 바로기제 옴 삼바라 삼바라 훔(3번)

시감로수진언

나무 소로바야 다타아다야 다냐타 옴 소로소로 바라소로 바라소로 사바하(3번)

일자수륜관진언

옴 밤밤 밤밤(3번)

유해진언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밤(3번)

 

예참(예배하며 참회함)

(의식집전 스님 외 대중은 첫 부분과 끝 부분만 한다.)

지심정례공양 상주법계 진언구중 반야해회 암밤남함캄 대교주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아바라하카 법계주 원만보신 노사바눌 아라바자나 사바일대교주 천백억화신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지심정례공양 신지광명 보주법계 청정무애 비지원만 제일과거 비바시불 제이시기불 제삼비사부불 원증법계 해탈삼매 구경법문 수순근욕 제사현재구류손불 제오구나함모니불 제육가섭불 제칠영산대교주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지심정례공양 과거삼존 현재사위 칠여래불 동방만월세계 십이상원 약사유리광여래불 서방정토 극락세계 사십팔대워 아미타여래불 남방환희세계 보승여래불 북방무우세계 부동존여래불 중방화장세계 내외십신 비로자나여래불 당래용화교주 자씨미륵존여래불

지심정례공양 참제업장 십이존불 지장원찬 이십삼존 제위여래불 능멸천재 성취만덕 금륜보계 치성광여래불 여대성 북두칠성존 제위여래불

지심정례공양 찬탄미타 육방제불 서멸중죄 삼십오불 삼천불조오십삼불 과현미래삼세 삼천제불 동방해탈등 오천오백존불 불명경중 팔천제불 미타참중 일천오백존불 대방광불화엄경 십처십회 주반중증 종종명호 난사제불 진허공 변법계 시방삼세 제망중증 무진해회 삼불원유유 십신무애 상주일체 진여불보

지심정례공양 복성동반 사라임중 인과교철 장엄보탑 일체여래 불입열반 선도성중 전단보탑 영산법회 증청묘법 다보여래 전신보탑 일체중생 회견보살 팔만사천 청정보탑 차산중대 적멸보궁 본사세존 진신사리 불뇌보탑 본사세존 전신사리 정골치아 보부인천 자비보탑 내지 천봉만학 평원광야 해안강두 중중무진 청정자비보탑

지심정례공양 일승원교 대방광불화엄경 대승종교 실상묘법연화경 대승시교반야경 대승돈교원각경 대불정수능엄경 비로계본범망경 칭찬정토아미타경 구모생천목련경 대보부모은중경 대원본존지장보살본원경 여시등청정 무장애 무진법문

지심정례공양 용궁해장묘만법 신묘장구대다라니 불정존승대다라니 태백삼계대다라니 성불수구대다라니 무애대비심백천대다라니 경률론삼장십이부 일체수다라 원만교해 진허공 변법계 시방삼세 제망중중 무진해회 삼대사융 십현구족 상주일체 심심법보

지심정례공양 오봉성주 칠불조사 대지문수사리보살 여래장자 법계원앙 만행무궁 보현보살 보문시현 원력홍심 대자대비 관세음보살 염불삼매 섭화중생 대회대사 대세지보살 능단무명 미세혹결 대지금강장보살 최멸중생 인아업산 대자제장애보살 자이넉선 서구중생 대원본존지장보살 진언궁중 신통장엄 불모대자 준제보살마하살

지심정례공양 상주금강 연설반야 대혜법기보살 분골향성 상제구법 살타파륜보살 여기구너속 일만이천보살마하살 대방광불화엄경 십불세계 극미진수 종종명호 난사보살마하살 극락세계 왕반무애 일체청정 대해중보살마하살 만허공 변법계 성라보익 진사보살마하살

지심정례공양 화엄말회 오십삼제위 선지식 여 일생능원 광겁지과 선재동자 영산당시 수불부촉 십대제자 십육성중 십팔성중 오백성중 독수성중 내지 천이백 제대아라한 무량자비성중

지심정례공양 서건사칠 당토이삼 오파분류 역대전등 제대조사 급아해동 초조전지조인 도의국사 호엄초조 원효조사 의상조사 자장율사 보조국사 진각국사 위작증명법사 지공 나옹 무학 삼대화상 태고왕사 환암선사 중흥조도 보안왕실 서산 사명 양대화상 내지 천하선지식 노화상 진허공 변법계 시방삼세 제망중증 무진해회 인언오위 과만십신 상주일체 청정승보

유- 원 무진삼보 대자대비 수차공양 명훈가피력 원공법계제중생 자타일시 성불도

 

보공양진언(널리 공양을 올리는 진언)

옴 아아나 삼바바 바아라 훔(3번)

보회향진언(모든 공덕을 널리 회향하는 진언)

옴 삼마라 삼마라 미만나 사라마하 자거라 바 훔(3번)

원성취진언(소원성취를 기원하는 진언)

옴 아모카 살바다라 사다야 시베 훔(3번)

보궐진언(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진언)

옴 호로호로 사야목계 사바하(3번)

찰진심념가수지 대해중수가음진 허공가량풍가계 무능진설불공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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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혜연선사 발원문

시방삼세 부처님과 팔만사천 큰법보와 보살성문 스님네께

지성귀의 하옵나니  자비하신 원력으로 굽어살펴 주옵소서.

 

저희들이 참된성품 등지옵고 무명속에 뛰어들어 나고죽는 물결따라 빛과소리 물이들고

심술궂고 욕심내어 온갖번뇌 쌓았으며 보고듣고 맛봄으로 한량없는 죄를지어

잘못된길 갈팡질팡 생사고해 헤매면서 나와남을 집착하고 그른길만 찾아다녀

여러생에 지은업장 크고작은 많은허물 삼보전에 원력빌어 일심참회 하옵나니

바라옵건데

부처님이 이끄시고 보살님네 살피옵서 고통바다 헤어나서 열반언덕 가사이다

이세상의 명과복은 길이길이 창성하고 오는세상 불법지혜 무럭무럭 자라나서

날적마다 좋은국토 밝은스승 만나오며 바른신심 굳게세워 아이로써 출가하여

귀와눈이 총명하고 말과뜻이 진실하며 세상일에 물안들고 청정범행 닦고닦아

서리같이 엄한계율 털끝인들 어기리까 점ㅡ잖은 거동으로 모든생명 사랑하여

이내목숨 버리어도 지성으로 보호하리 삼재팔난 만나잖고 불법인연 구족하며

반야지혜 드러나고 보살마음 견고하여 제불정법 잘배워서 대승진리 깨달은뒤

육바라밀 행을닦아 아승지겁 뛰어넘고 곳곳마다 설법으로 천겹만겹 의심끊고

마군중을 항복받고 삼ㅡ보를 뵙사올제 시방제불 섬기는일 잠깐인들 쉬오리까

온갖법문 다배워서 모두통달 하옵거든 복과지혜 함께늘어 무량중생 제도하며

여섯가지 신통얻고 무생법인 이룬뒤에 관음보살 대자비로 시방법계 다니면서

보현보살 행원으로 많은중생 건지올제 여러갈래 몸을나퉈 미묘법문 연설하고

지옥아귀 나쁜곳에 광명놓고 신통보여 내모양을 보는이나 내이름을 듣는이는

보리마음 모두내어 윤회고를 벗어나되 화탕지옥 끓는물은 감로수로 변해지고

검수도산 날선칼날 연꽃으로 화하여서 고통받던 저중생들 극락세계 왕생하며

나는새와 기는짐승 원수맺고 빚진이들 갖은고통 벗어나서 좋은복락 누려지다

모진질병 돌적에는 약풀되어 치료하고 흉년드는 세상에는 쌀이되어 구제하되

여러중생 이익한일 한가진들 빼오리까 천겁만겁 내려오던 원수거나 친한이나

이ㅡ세상 권속들도 누구누구 할것없이 얽히었던 애정끊고 삼계고해 벗어나서

시방세계 중생들이 모두성불 하사이다 허공끝이 있사온들 이내소원 다하리까

유정들도 무정들도 일체종지 이뤄지이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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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주진언  옴 루찌라마니 따와따야 훔(7번)

일곱번 염송하고 염주에다 입김을 불어넣고서 염주를 돌리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모든 진언을 몇 억 번 외우는 것과 공덕이 같다고 보물 늘어나는 궁전에서 말씀하셨다.

 

 

▶발 아래 죽은 축생을 위한 진언  옴 체짜라가나 훔 시소하

아침에 세 번 외우고 발에 침 뱉으면 그 날 발 아래 죽는 벌레 모두 삼십삼천에 태어나게 된다.

▶육식 진언  옴 아비라 케짜라 훔

일곱번 외우고 고기에다 입김을 불면 고기 먹는 허물이 없고, 그 죽은 축생이 선도에 태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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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붓다 2017. 9. 30. 02:26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 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 일체고 진실불허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x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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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24 경신년 (음 1980년 12월 8일) 성도재일 

 

 

 

법좌에 올라 양구한 후 주장자를 들어 법상을 세 번 내리치고 이르시길.

 

오늘은 석가세존께서 밝은 별을 보시고 도를 깨달으셨다고 하는 납월 팔일 <음력 섣달 12.8> 입니다.

그러면 우리 대중은 세존께서 밝은 별을 보시고 도 깨달으신 도리를 한 번 봅시다.

대체 석가모니부처님이 별을 어떻게 봤으며 무슨 일을 했는가. 우리 한번 따져 봅시다. 이게 참말인가? 거짓말인가?

 

대중아, 하나도 빠짐없이 이 주장자 머리를 봐라!.이걸 바로 봐야 돼. 그냥 고개 수그리고 앉았으면 내 얘기를 잘 몰라.

분명히 이 주장자 머리를 대중이 모두 다 보고 있어.

 

그러면 석가세존께서 보신 별과, 내가 이렇게 들고 있는 이 주장자 머리와 다른가 같은가?

 

주장자 머리에 눈이 있으니 만약 이 주장자 머리에 눈이 있다는 것을 아는 납자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석가여래와 미륵 부처님이 도망갈 문이 없고 임제와 덕산스님이 몸 감출 곳이 없어.

그것이 어떠한 도리인고?

 

!

 

법좌에서 일갈하시다.

 

용맹스러운 사자입 속에 든 밥을 뺏어 오는 도리요, 신령스러운 턱 밑에서 여의주를 꿰어 목에 걸어오는 도리더라.

이것이 옳은가? 그른가?  <탕!>

 

법좌에서 주장자를 세워 법상에 한 번 내리치시고.

                

                             

 

세존견성시하사  일물원래무면목

世尊見星是何事  一物元來無面目


 

덕숭의구성총림 설리매향촉비래

  德崇依舊盛叢林 雪裡梅香觸鼻來  

 

세존께서 별을 보시니 이 무슨 일이냐?

한 물건이 있으되 원래 모습이 없어

 

덕숭산은 의구하여 총림이 무성하니

눈속의 매화꽃 향기 코를 찔러 오더라.

 

 

 

석가세존께서 새벽녁 밝은 별을 보시고 도를 깨달으셨다고 하는 일이 대체 무슨 일이더냐? 작은 일이 아니고 큰 일이야. 큰 일이어도 천상천하에 이것보다 더 큰 일이 없어. 제일 큰 일을 하셨어.

큰 일을 하셨다고 하는 그 일이 대체 무슨 일이더냐? 한 물건이 있으되 본래 모양이 없어.

 

덕숭산에 선원을 연 지가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되는 기간 동안에 경허선사가 열반 하셨고, 만공선사가 열반하셨고, 용음선사가 열반하셨고, 고봉선사가 열반하셨고, 금봉선사가 열반하셨습니다.

 

여기에 아주 훌륭한 선지식들이 출현을 해서, 많은 선객과 정안 남자길러낸 도량입니다. 그런데 70년 후의 오늘날까지도 이 덕숭산 산림 대중은 무성할대로 무성해서, 이와 같이 용맹정진하고 있습니다.

 

덕숭산은 의구하여라!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요. 그래서 이 덕숭산 상없는 가풍이 이렇게 무성하게 자라난 곳에  '눈 속에 매화꽃 향기가 코를 찔러 오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석가모니 부처님의 견성오도에 대해서 조금 더 주석을 달겠습니다.

 

 

 

일견명성몽변회 천년도핵장청매

一見明星夢便廻 千年桃核長靑梅


 

수연불시조강미 증여장군지갈래

雖然不是調羹味 曾與將軍止渴來

별을 한 번 보고 꿈을 문득 돌이키니

천 년 되는 복숭아씨 속에 길이 매화꽃이 푸르렀더라.

 

비록 국 맛이 고르지 아니하나

일찍이 장군으로 하여금 목마른 것을 그치게 하더라.  

                                               

 

 

석가세존께서 도를 통하신 까닭이 별에 있는 게 아니야.

그 까닭은 별을 보는 놈! '별을 보는 놈' 여기에 까닭이 있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보신 것은 별이 아니야. 바로 별을 보는 놈을 보셨어. 분명히 이것은.

내가 비록 지옥으로 화살같이 가는 구업을 짓는다고 하더라도 다시 이보다

더 가깝게 할 말은 없어. 석가여래가 별을 보신 것이 아니야. 별 보는 놈을 봤어.

 

그래서 별을 인해서 도를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문득 꿈을 돌이킨 거야. 꿈라고 하는 그 자체가 사실이 아니잖아. 사실이 아닌 그게 꿈이라고 하는 거야. 여러분들은 이렇게 얘기하면 다 알아 들을 수 있는 얘기야. 꿈이라고 하는 게 사실이 아니잖아.

                           

석가모니 부처님이 도를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을 돌이킨 거야.

사실이아닌 것을.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 나와서 생명을 가지고 살면서, 좋고 싫고, 이렇게 보고 듣고, 나고  죽고  온삼라만상이 틀림없이 역력분명하되, 또한 그 근본 자리에 돌아가서 사실이 아닌 도리가 있어. 사실 속에 사실이 아닌 도리가 있어. 사실 아닌 도리를 바로 깨달아야 사실을 알게 되는 거야.

 

그러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별로 인해서 도를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문득 꿈을 돌이키셨더라 이 말이야. 천 년이나 되는 복숭아씨 속에 길이 매화꽃이 푸르렀더 라. 이러한 도리가 있습니다.

 

비록 국 맛이 고르지는 아니하나, 그 국 맛을 가지고서 만족하게 기갈을 면할 수는 없으나, 일찍이 장군으로 하여금 목마른 것을 그치게 하니, 이것이 대체 무슨 도리냐?

 

옛날에 어떤 장군이 백만 대병을 인솔해 사막을 통과하는 중에 물도 없고 허기도 지다리도 아프더란 말이야.  물을 먹어야 살겠는데 사방에 사막이라 물이 없어. 물은 없고 끝없이 햇볕이 쬐어 기갈이 극에 달해 병사들이 퍽퍽 쓰러져 죽어. 도저히 갈 수가 없게 되었어.

 

이렇게 절박한 경계에 다다라서, 그들에게 물 한 모금도 먹이지 아니하고, 갈증을 하게 만드는 도리가 있다 이 말이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장군이 백만 대군을 불러 앉혀 놓고서는 입담 좋게, 아주 실감나게 이야기를 하는데.. 무슨 얘기를 하는고 하니,

 

“내가 매화 숲 속에 들어가서 매실을 따먹었느니라. 매실을 따먹으니 그 매화 열매의 시구러운맛이 기가 막히더라.”

 

 

병사들이 그 얘기를 멍하니 듣고서는 상상을 해. 상상을 하니까 입안에 침이 막고여서 그 침을 넘겨 가지고서 갈증을 면했어.

 

 

그것 참 묘한 도리야. 목말라서 쓰러져가는 군대구해준 것은 진짜 물이 아니란 말이야. 장군의 말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어. ‘시다는 그 마음이 움직이니까 침이 생겼어.

 

 

그 ‘시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움직이는 이 묘 도리를 대중이 알아들을 것 같으면, 영원한 생사의 기갈에서 진락을 얻을 것이라는 말이야.


 

오늘 법회에 훌륭한 분들이 많이 오셨고, 우리 정진대중도 용맹정진을 계속해잠을 자지 아니 했는데, 그러면 대체 불교라고 하는 것이 왜 이 세상이렇게 존재하느냐? 밥 먹고 살면 되는 일이지 무엇 때문에 불교라는 것을 믿어야 하고 찾아야 하느냐 말이야.

 

 

불교라고 하는 것은 냉정하게 말해서 등신불을 믿는 것도 아니고, 경전외우는 것도 아니고, 주력을 하는 것도 아니고 머리 깎는 것도 아니고, 가사장입는 것도 아니고, 청정한 계행 지키는 것도 아니야.

 

그런 건 다 불교가 아니야. 필요에따라서 하는 것이지. 또한 사찰도 불교가 아니고. 그러면 무엇이 불교냐 이 말이야. 과거에 도를 깨달았다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불교인가? 그거 불교 아니야. 세음보살이 불교인가?

 

그것도 불교가 아니야. 그러면 뭐가 불교냐? 다 불교가 아니라면, 나보고 미쳤다고 할는지도 몰라.. 절대로 그걸 불교라고 할 것 같으면 불교를 잘못 믿는 외도야. 그것이 바로 외도야. 러면 어떻게 불교를 믿어야 하느냐?


 

여기에서 우리 대중들이 진실하게 똑바로 알아들어야 돼. 내가 불교야. 부득불 불교라고 이름을 붙여서 얘기를 하지만, 하나님도 불교가 아니고 부처님도 불교가 아니야. 내가 불교.

 

 

모두가 다 '나'를 가지고 삽니다. '나'를 가지고 태어났고, '나'를 가지고 살고, '나'를 가지죽습니다. 누가 '나'를 만들어 준 것도 아니고, 누가 '나'를 살려 주는 것도 아니고 누가 '나'를 죽이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생겨나서 내가 살다가 내가 죽는 거야.

 

 

 

그러니 모든 것이 '나'.

나 말고 다른 물건이 있다고 하면 거짓이야. 전부가 나야. 지금 우리가 진실로 나를 알지못했기 때문에 너와 내가 있고 하늘, 땅이 있고 부처와 범부고, 생과 사가 있고, 이리저리 너절한 것이, 호화찬란 많이 있는 것 같지만.

 

진실로 나를  사람에게는 그러한 것이 분명히 없어. 거짓말로 없는 게 아니라 분명히 없어. 나님을 여의고서도 살 수 있고, 부처님을 여의고서도 살 수 있고, 옷 하나도 안 입고 살 수 있고, 부모처자 없어도 살 수 있어.

 

 

그러나 '내'가 없으면 살 수가 없어. 이 내가 없으면 살 수가 없어! 이렇게 가깝고, 이렇게 긴요하고, 이렇게 진실한 나를 우리가 아느냐?

 

 

그렇게 현묘한 나를 가지고 있으면서 나를 아는 사람이 없어. 그러면 '나'를 알면 어떻고, 모르면 어떠냐? 이게 문제입니다.

 

 

나를 알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삼라만상이 벌어져 가지고 와 차가 생기고, 나와 남과, 생과 사가 생겨. 그러니까 '나'를 알지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바로 범부요, 생사고에 영원히 떨어져 버리는 거야.

 

 

나를 안다고 할 것 같으면 생사에 상관이 없는 것이고, '나'를 안다고 할 것같으면 저 삼라만상과 내가 둘이 아니야. 내가 둘이 아니야! 하늘 땅이 생기기 이전의 그 면목'나'야.

 

 

불교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 필요해서 믿고 닦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근본을 찾아 들어가는 법이 불교야. 이것을 알아야 해. 이것을 알지 못하고 다른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형식이지 불교는 아닙니다.

 

 

오늘 여기 처사님들이 많이 있으니까 처사님 얘기를 한 마디 하겠습니다. 옛날 중국 송나라 때의 소동파는 유불선 삼도에 무불통지훌륭한 학자였습니다. 이 소동파가 자기에 대해 생각해 보니 세상의 이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걸림이 없어.

 

 

그러고 보니 그 이치에 대해서 누군가와 그 진리에 대해서거량을 해 보고 싶은데 아무리 봐도 상대가 없어. 어느날 자기 계획대로 동림사의 상총선사를 찾아갔어. 찾아가서,

 

“스님의 이름이 무엇이요?” 하고 물었어.

“아무개올시다.”


 

그 스님이 자기 성명을 대 줘.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남의 이름만 물어 보고 자기 성명은 대지를 않거든. 그러니까 상총스님이 소동파의 이름을 물었어.

 

“당신 성명은 뭐요?”

 

“예, 나는 칭거사올시다.”

 

“그래 무슨 칭자요?”

 

“저울대 ‘칭자올시다.”

“하고 많은 문자를 다 두고서 어째 저울대 ‘칭’자를 쓰시오?”

“천하 도인들을 저울질하고 다니는 처사이기 때문에 그래서 저울대 ‘칭’자를 놨소이다.”  

이렇게 말을 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스님이 느닷없이 ‘악!’ 하고 소리를 냅다 한 번 지르고서,


“이 소리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달아 봐라.”

 

 

거기서 꽉 막혀 버렸어. 고승이 아니라 고승대덕 할아버지라도 한번 해 볼자신을 가지고 갔는데 그 한 마디에 그냥 꽉 막혀버렸어.

 

그러나 그 상황을 쉽게 받아들일 소동파가 아니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 하고는 휑하니 나갔어. 자존심을 꺾지는 않았지만 사실은 거기서 완전히 죽어 버렸어.

가면서 생각해 보니까 그런 봉변이 없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정신없이 말을 타고 가다가 개울을 지나는데 쏴 하고 흘러가는 물소리를 듣고서 그만 깨달았어. 물소리를 듣고.. ‘한 번 소리지른 무게를 달아 보라’는 말의 이치를 알았어.

그러고는 오도송을 지었어.

 

 

 

계성변시광장설 산색기비청정신

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淸淨身

 

 

야래팔만사천갈 타일여하거사인

夜來八萬四千偈 他日如何擧似人

 

 

개울 물소리 부처님의 다함없는 법문이요

산 빛이 그대로 부처의 몸일세.

 

 

어젯밤 깨달은 팔만사천 가르침을

어떻게 그대에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게송을 지어 놓고 보니까 참 근사하거든. ‘야, 이것 가지고 가서 또 한 번 적을 해 봐야 되겠다’ 하면서 가다가 다시 돌아왔어. 다시 와서는 “내가 이 게송을 지었으니 한 번 감정해 보시오.” 하며 내놨어.

 

 

그러나 스님은 그냥 치워 버려. 쓸데없는 도깨비짓 하지 말라는 거야. 근사하게 오도송을 지었는데 또 쫓겨났어. 집으로 돌아가서 밤잠을 안 자고 공부를 했어. 그 때 터져 나온 오도송이 이거야. 참 견성구지.

                           

 

 

여산연우절강호 미도천반한부소

廬山煙雨浙江潮 未倒千般恨不消

 

 

도득환래무별사 여산연우절강호

到得還來無別事 廬山煙雨浙江潮

 

 

여산의 안개비와 절강의 물결이여

이르지 못했을 땐 천가지 한이었네.

 

 

이르고 보니 별다른 것이 아니라

여산의 안개비와 절강의 물결이네.

 

 

 

이 게송을 가지고 또 상총스님한테 갔어.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끄덕 했어.

그렇게 소동파가 두 번 오도를 했는데, 이 게송이 두 번째의 오도송입니다.

 

 

용맹정진을 하고 어려운 법문을 듣고 할 적에는, 등에 땀이 나고 이마에 땀이 나답답하고 어렵지만, 중국의 소동파 같은 이도 상총스님한테 주장자도 맞고 야단도 듣 이렇게 많이 애를 썼기 때문에 위대한 재가의 선지식이 된겁니다.

 

 

그러니까 이번 수련법회에 참석한 모든 불자들이 과거의 소동파처럼 된다면, 우리나라는 세상을 밝게 하는 국가가 될 겁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앞으로 온 세계에 나를 깨달아서 '참나'를 아는 그러한 정신문명의 맹주가 될 기를 당부드립니다.

 

 

이 공부를 하는 데에 있어서 여러 가지 방편설도 많고 이러저러한 말도 많습니다만 속지를 않아야 공부를 바로 하게 됩니다. 말에 속고, 형식에 속고, 법문에 속고, 전부 속아. 아서 그냥 일생을 흘려보내.

 

 

속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 비유컨대 무엇과 같은고 하니 원숭이라고 하는 놈과 같다 이 말이야. 그놈이 제 그림자를 보고서 자꾸 잡으려고 그래. 잡으려고 자꾸 헛손질을 한단 말이야. 암만 잡으려고 애써 봐야 그림자가 어디 잡히나.

 

 

분명히 있기는 하지만 잡을 수는 없어요. 그런데도 원숭이란 놈은 제 그림자를 제가 잡으려고 그런단 말이야. 우리 선객들이 노력을 하는 것이 마치 원숭이가 제 그림자 붙들려고 하는 것과 같아.

 

 

이 붙들려고 하는 놈이 바로 저야!

 

그 그림자 암만 붙들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어. 그림자를 붙들려고 노력하는 요게 바로 저다 이 말이야.

 

그런데 그림자가 저인 줄 알고 붙들려고 하네.

 

허 참.... 이게 참 묘한 비유야.

 

 

이 그림자에 따라가지 말고, 이 그림자를 잡으려고 하는 요놈을 돌이킬 줄을 알아야 해.

 

‘일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이 하나가 무엇인고?’

 

‘조주스님이 '無'라 일렀으니, 어째서 무라고 이른 뜻이 무엇인고?’

 

모든 화두를 이렇게 외고 앉았는데, 화두를 하되 그 화두를 쫓아가지 말고 화두 드는 ‘그 놈’을 돌이킬 줄 알아야 됩니다. 

 

 

 

 

오늘은 성도재일입니다.

부처님께서 날마다 별을 보셨지만, 오늘 별을 보신 것은 반짝거리며 허공에 있는 그 별을 본 게 아니고 별을 보는 ‘’을 보셨어. 그렇듯이 우리 대중들도 자꾸 화두만 들고 앉았을 게 아니라 화두 드는 놈을 한 번 들어봐.

 

 

긴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선을 해서 생사영단한다하는 것은 참으로 큰 일이에요. 그러나 그 문제가 그렇게 복잡하지를 않아. 간단해. 모든 것은 다 생각이야.

 

 

참선을 하느니, 주력을 하느니, 무엇을 하느니, 그것이 다 우리 생각으로 하는 거야. 이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으로써 생각을 다 하는 것이야. 생각을 잡고 그것을 연속하는 것이 참선이 아니라, 생각으로써 생각 다한 곳을 돌이켜.

 

 

이것이 아주 참 간절한 소리라. 생각은 생각이야. 사실, 세속 생각하는 거나, ‘이 뭣고’ 생각하는 거나, 생각은 똑같은 생각이야. 그러나 이 참선한다고 하는 생각은 생각으로써 생각 다한 곳을 돌이키는 거야.


 

세상 생각은 자꾸 생각으로써 생각이 번져나가는 생각이지마는, 이 참선이라고 하는 이 공부는 생각으로써 생각을 다 하는 곳에 돌아가.

 

 

생각으로써 생각 다 하는 곳에 돌아가되, 다 했다고 하는 놈마저 아주 없어야 돼. 영 없어야 돼. 참 이게 기막힌 말이야. 없다고 하는 놈이 있어서는 안 돼. 아주 없어야 돼.

 

 

그 자리에 이를 것 같으면 이사가 무이야. 깨달음과 미한 것이 둘이 아니야.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야. 제불조사와 내가 또한 둘이아니야. 옛과 지금이 둘이 아니야 

 

그러면 하나냐? 하나도 아니야. 이렇게 되는 그 자리에 이르면 다 되었느냐?

‘이러한 땅에 내가 도달한다고 하더라도 삼생육십겁을 참선 해야 얻는다.’ 이랬어. 진실해야 돼.

                        

 

불법문중에서 가장 큰 죄가 있는데 사람을 죽이는 죄보다도 더 크고, 세상을 불사른 죄보다 더 큰 죄가 있는데, 정법을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체하는 죄다 더 큰 죄가 없어. 참 그것이 큰 죄야. 그 경지에 도달하더라도 삼생육십겁 참선해야 비로소 일이 돼요.

 

 

그렇게 된 후에야 밑 없는 배를 타고 큰 바다를 자재롭게 떠다닐 수 있어요. 이렇게 된 뒤에 비로소 불조의 은혜를 갚고 일체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거야. 우리스님들의 책임이 과연 얼마나 무거운가를 깨닫고, 내 마음을 밝히지 못했다고 할 것 같으면 무서운 줄을 알아야 돼요.

 

 

참말로 무서운 줄을 알아야 돼. 차라리 팔팔 끓는 쇳물을 한 사발 먹을지언정, 시주의 밥 한 그릇을 공부 안하고 먹을 생각을 하지 말아라 그 말이야.

 

 

요새 스님들은 신도들이 자꾸 바치니까 이게 무슨 공짜인 줄 알고서 자꾸 수용하고 그러는데 그거 큰일난다고. 그거 먹고서 당장 죽으면 그 업이 가볍지만, 그거 갚아주려고 그 집에 가종노릇 하려면 일생동안 해도 안돼요. 몇 생을 드나어 종 노릇 할 생각을 해야 돼요. 

 

지금은 신도들한테 절 세 번씩 받고, 뭐 공양을 받고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야. 공부 없으면 그게 모두 그 사람한테 갚아야 할 빚인 것을 알아야 돼. 큰일 난다고. 절대로 공짜가 없어. 그러니까 우리 스님네들은 시주물을 무서워해야 하고, 시간이 무서운 줄을 알아야 돼.

 

 

 

이 시간이 짤깍짤깍 가는 대로 나에게는 죽음이 그만큼 가까워져요. 한번 죽은 다음에 이 몸뚱이를 다시 얻을 수 있느냐? 이 몸을 다시 얻기가 어려워.

​                                                   

사람의 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출가를 해서 부처님의 무상정법을 만나기가 어려워. 정법을 깨닫기가 어려워. 그런데 우리는 지금 사람 되어 출가하여 이 무상정법을 닦아 가는 마지막 어려운 고비까지 올라 왔는데,

 

이렇게 여기에서 몇 억만 년을 지나도 만나기 어려운, 이렇게 다행스럽고 이렇게 좋은 호화를 멍하니 시줏밥만 먹고 그냥 졸고 망상 피우고 허송세월 한다고하이게 얼마나 한심하고도 가련한 인생이냐 이 말이야.

 

공연스레 큰방에 앉아 있으니까 무슨 부처 된 것처럼 허송세월하며 속지를 말고 속으면 큰일납니다.

 

 

 

어쨌거나 공부를 잘 하든 못 하든. 깨달았건 못 깨달았건 이 무상정법한 번 닦겠다고 시늉만이라도 낼 것 같으면 다 조사가 될 수 있느니라.

 

 

 

주장자를 세워 법상을 세 번 내리치시고 내려오시다.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crane&logNo=220903101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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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희스님 구도기

붓다 2017. 8. 22. 22:16

 

묘리 법희(妙理 法喜) 선사 구도기 (1987~1975)
 

법희스님은 1887년 2월 9일, 충남 공주군 탄천면 신기리에서 태어나셨다. 
 
네 살에 어머니와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동학사 미타암으로 출가하여 14세에 귀완스님을 은사로 동운(東雲)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았으며, 다시 동학사로 돌아와 만우강백(萬愚講伯) 회상에서 사집(四集)과 사교(四敎)를 마치셨다. 
 
23세에 가야산 해인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2년여 동안 남쪽지방으로 운수납자행을 하셨다. 
 
25세에 경북 김천 청암사에 머물러 '법화경'을 보던 중 사교입선(捨敎入禪)의 뜻을 세우고 당시 제방에 법력을 크게 떨치던 수덕사 만공선사를 찾아가 법제자가 되기를 청하여 만공회상에 입방하였다. 
 
만공스님으로부터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그 하나는 무엇인가 (萬法歸一 一歸何處 一是甚?)' 라는 화두를 받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動靜)의 일상생활 전체가 참선으로 시작해서 참선으로 끝나도록 애쓰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27세에는 자신이 당시 치사율이 높은 천연두에 걸린 것을 알고 견성암 뒷산으로 올라가 생사를 넘나드는 순간에도 화두를 놓지 않고 한 달여를 칩거한 끝에 죽음을 물리침과 동시에 심안이 열리게 된다. 
 
이후에는 맡은 소임이나 대중 운력이나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일하는 동시에 생각은 선정에 드는 경지에 머무르게 되었다. 
 
"모두 한마디씩 일러보라" 
 
법희스님이 대중 속에서 단정히 일어나 큰스님께 답하기를, 
 
"고기가 가니 물이 흐려지고(魚行水濁) 새가 나니 깃털이 떨어집니다(鳥飛毛落)" 
 
만공스님의 날카롭게 쏟아지는 눈빛을 피하지 않고 법희스님이 이렇게 대답하자 만공스님은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음, 공부가 제법 익었구나" 라고 하셨다. 
 
또 하루는 만공스님께서 한용운 스님의 '흰 눈 속에 복사꽃이 조각조각 흩날린다'라고 한 구절을 들어서 대중에게 물으시기를,  
 
"흩날린 꽃송이는 어느 곳에 있는고?" 하니, 
 
법희스님께서 조용히 일어나서 말씀드리기를, 
 
"눈이 녹아지니 한 조각 땅입니다(一片地)" 
 
이에 만공스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렇지. 다만 한 조각 땅을 얻었을 뿐이니라(只得一片地)" 하셨다. 
 
어느 날인가 만공스님은 시자를 시켜 각 암자와 큰절에 기별하여 산중 대중을 모두 법희스님이 머물고 있는 견성암으로 모이도록 하였다. 
 
"내 요즘 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짰지. 오늘 그 그물에 고기 한 마리가 걸려들어 살려 달라고 버둥거리고 있거든. 자 어떻게 이 고기를 살릴 것인지, 그대로 죽게 내버려둘까? 어디 대중은 한 마디씩 일러보아라"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음에도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살얼음판을 걷는 듯 긴장된 분위기였다. 
 
조금 있으니 한 수좌가 일어나 머뭇거리며 무어라 입을 떼려 했다. 
 
"옳지. 드디어 한 마리 걸려들었구나" 
 
만공스님은 그물을 낚아채는 시늉을 하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였다. 
 
스님의 장난기로 다소 여유가 생긴 대중은 한 사람씩 용기를 내어 자기 소견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만공스님은, "음, 또 한 마리가 잡혔구나" 라며 무릎을 두드리고 손뼉을 치며 눈물이 나오도록 웃었다. 
 
"옳지, 옳지! 오늘은 아주 많이 잡히는군" 
 
팔을 걷고 고기를 움켜쥐는 시늉을 내는 사람, 낚싯대를 던지는 동작을 하는 사람, 그물을 찢어 버리겠다는 사람 등 여럿이 만공스님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들고 있었다. 
 
어떻게 대답을 해도 "음, 또 한 마리. 어허, 웬 눈먼 고기가 이리 많누" 하며 모두들 잡아들이자 더 이상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뒤편에 앉아 있던 법희가 슬그머니 일어나 만공스님에게로 다가가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스님, 차공양 올리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오! 이제야 눈밝은 수좌를 만났군. 그래, 살림살이가 언제부터 그리 넉넉해졌는가?" 라며 크게 기뻐하셨다. 
 
만공스님은 이렇게 서너 차례 법희스님의 오도를 시험해 보고는 얼마 후 드디어 그의 깨달음을 인가하며 '묘리당(妙理堂) 법희'라는 법호를 내리셨다. 
 
1916년 법희스님의 나이 30세의 일이다. 
 
이때 만공스님은 전법게와 함께 말씀을 전한다. 
 
"희수좌는 득력(得力)했어. 마침내 장부일대사(丈夫一大事)를 마쳤지. 그러나 마음의 본성 자리를 찾아내는 일도 어렵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오후(悟後) 수행이야. 
 
깨달은 후에 내가 깨쳤네 하는 생각에 머무른다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일밖에 남는 게 없어. 
 
이제부터 자네는 오후 수행에 전념하고 금생에는 어느 자리에서나 법을 설할 생각 말게나. 
 
요즘 사람들은 용심이 지나쳐 시기하는 자가 많으니 자네의 시절인연이 그런 줄 알고 내 말을 잊지 말도록 하게" 
 
만공스님의 당부를 받은 법희는 이후 평생 동안 그 말을 지켰다. 
 
비구니 도인스님이 났다는 소문은 곳곳에 퍼져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법을 듣고 가르침을 받기 위해 문하에 들어왔지만 단 한 번도 법상에 올라 법문을 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공부하는 수좌들을 위하여 손가락 마디가 괭이가 되도록 후원일과 농사일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선승들을 제접함에 있어서 이와 같이 말없는 가운데 무진법문을 열어 보이셨으니,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저절로 교화되어 오체투지토록 하셨던 것이다. 
 
스님은 오도 후 입적하실 때까지 60여 년 동안 한국불교 비구니 제일선원인 견성암을 주처로 하여 덕숭산 보덕사, 천성산 내원사, 사불산 윤필암, 화엄사 구층암, 서울 정릉동 인수재(尹大妃의 처소) 등지를 오가며 제2, 제3의 참선도량을 이루었다. 
 
노년기 70여 세에 다시 덕숭산 수덕사 견성암 비구니 총림에 들어가서 원장으로 추대되어 크게 선풍(禪風)을 떨치며 한 세기 가까이 출가 수행자의 길을 여법하게 걸으셨으면서도 법어(法語) 한 마디 남기지 않고 신심돈독과 계행청정으로 온 삶을 보내신 스님은 1975년 3월 9일, 세수 89세 법랍 85세를 일기로 세연을 다하셨다. 
 


만공스님의 전법게 
 
만상이 적멸함은
석가의 얼굴이요
적멸이 멸하여 다함은
진귀조사(眞歸祖師)의 면목이로다 
 
몸을 나투신 지 2, 3천 년에
묘리(妙理)의 참다운 빛이
영원토록 어두워지지 않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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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언정진 - 고암스님

붓다 2017. 8. 20. 04:10



​독립운동가 33인의 한 사람인 백용성스님의 제자 고암스님이 겨울 한 철 묵언정진 하겠노라고 허락을 청하자

"묵언이란, 입밖으로 말 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해서 묵언이 아니요, 입밖으로 말 하지않는것은 물론, 마음 안에서도 말을 않는 것이 묵언 정진이야."

"네 스님, 여법한 묵언정진을 한번 해 보겠습니다."

그리고는 겨울 한 철 동안 여법한 묵언정진을 무사히 끝나는 날, 용성스님 이 고암스님 에게 이르시기를

"이제 말을 틀것을 허락을 할 것인즉 어디 첫 마디 한 마디를 일러 보시게나?"

"........"

스승이 말문을 트라고 거듭 다그치는 데도 아무 말도 없이 빙그레 미소만 짓고 있자,

"아, 이 사람아 스승이 말문을 트라고 허락을 하였는데도 어찌하여 말문을 열지 않으신가?"

고암스님은 용성스님이 말문을 열것을 계속 다그쳤으나 계속 빙그레 미소만 지어 보이자.

"아니 이 사람 한 마디 이르라 했드니 빙그레 웃음이 첫 마디 이든가?"

"네, 스님, 그렇사옵니다."

"하하하 이 사람 자네가 아주 벙어리가 되어버린줄 알았네 이 사람아."

"그동안 묵언 정진 하신 소감은 어떠하신가?"

"네 스님, 말을 하고 살 적이나 말을 하지 않고 살적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사옵니다."

"그럼 묵언 정진은 무엇하러 했단 말인가?"

"네 스님, 입으로 하는 말이 얼마나 쓸데 없는 것인줄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자네가 나에게 법문을 다 하고 있네 그려.."



두 귀로 들리는 소리는 알아듣기 쉬우나 소리없는 소리는 알아 듣기가 어려운것.

즉 눈에 보이는 것, 소리로 들리는 것, 손으로 만져지는 것, 코끝에 냄새로 맡아지는 것, 이런것들은 모두 다 허망한 것이니, 형체가 있고 빛갈이 있고 냄새나는 것에 집착하다보면 깨달음과는 삼만팔천리 멀어지는 것 마음에 눈으로 형체없는 것을 볼 줄 알고, 마음에 귀로 소리없는 소리를 들을 줄 알고, 마음에 코로 냄새없는 냄새를 맡을 줄 알고, 마음에 혀로는 무미의 맛을 느낄 줄 알고, 마음에 몸으로는 닿지 않는 감각을 느낄 줄 알고, 뜻으로는 일체가 각각 분리된 개체가 아님을 알고, 모두가 일여한 것을 깨달으면 바로 무한 도(道)를 깨닫게 되리라...


깊은산골 초막한간 묻어놓고 한이없이 감사하니
사방에는 새소리가 아련하니 한이없이 즐거웁고
싱그러운 솔바람이 불어대니 한이없이 상쾌하고
초막가로 맑은물이 흘러주니 한이없이 풍족하고
푸른하늘 흰구름은 둥실둥실 한이없이 자유롭고
우뚝솟은 산봉우리 의젓하니 한이없이 당당하고
청산첩첩 푸르르고 잠잠하니 한이없이 평온하고
내도량에 척추세워 앉았으니 한이없이 정적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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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가 되거라

화두를 참구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옛 조사(祖師)들이 그랬듯이, 경봉스님께서 특히 경계한 것도 망상과 졸음과 혼침(昏沈)과 산란(散亂)에 지겹도록 시달려서 스스로 용기를 잃고 물러서는 것이었다.

경봉스님께서는 참선 수행을 하려면 집에 주춧돌을 놓듯이 먼저 큰 원력(願力)을 세워서 대신심(大信心)을 일으키고, 옛 성현(聖賢)들 처럼 기필코 내 마음을 깨우치겠다는 대분발심(大憤發心)을 내어야 하며, 화두에 대한 큰 의심(大疑心)을 가져야만 부처나 조사의 관문을 통과할 수 있다 하시고, 이를 먼저 갖출 것을 당부하셨다.

경봉스님은 80 고령에도 밤을 새우며 정진하셨다.
선방(禪房) 수좌들이 잠을 자지 않는 용맹정진에 들어가거나 세 시간만 자는 가행정진(加行精進)이 시작되면,
스님은 수좌들의 잠을 깨우기 위해 밤새 헛기침을 하시거나 한밤중에 과자 봉지를 들고 선방으로 찾아가시곤 했다.

조는 사람의 등을 두드려 주고, 과자를 나누어 주시면서
간단한 선문답과 격려의 말씀을 들려 주셨다.
특히 화두 공부가 잘 안 되어 찾아 오는 구도자가 있으면
스님은 여러가지 말로써 무섭도록 힘을 불어 넣어 주셨다.

"바보가 되거라. 사람 노릇하자면 일이 많다.
바보가 되는 데서 참 사람이 나온다."

"이 공부는 철저하게 생명을 걸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무쪼록 한 생(生) 나오지 않은 요량하고 마음을 비워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나무칼로 베듯 하지 말고 단박에 결판지을 일이다."

"쇠가 아무리 굳어도 열이 3천도가 되면 녹는다.
죽기를 각오하고 주인공에게 맹세를 하면서 공부를 해도 될듯말듯 한데, 조금만 고통스러워도 못견뎌 하니 어림도 없는 노릇이다. 졸음이 오면 허벅지를 꽉 꼬집어 비틀어서 잠을 쫓아버리고 용맹을 떨치며 공부해야 한다."


"망상이 일어나거든,

'네 이놈! 네 말만 듣고 다니다가 내 신세가 요모양 요꼴이 되었으니 이제는 내 말 좀 들어봐라. 죽나 사나 한번 해보자.'

하고 용맹을 내어야 한다."


"업장을 녹이는 방법이 한가지 있다. 누가 자기를 보고 잘못한다고 나무라면 설혹 자기가 잘 했다고 하더라도, '예,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절을 한번 하면 그 때가 바로 업장이 녹아질 때다.
잘못했다고 나무라는데 '나'라고 하는 것이 가슴에 꽉 차 있으면 업장이 녹아질 수가 없다. 그만 다 비우고 '내가 잘못했습니다'라는 한마디와 함께 아무 생각없이 절을 하는 그때가 다겁다생에 지은 죄악이 막 녹아질 때다."

이유없는 참회는 바보의 행위일지 모르지만, 바보가 될 때 모든 업장은 해탈과 자유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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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외계인의 말에 따르면 지구밖엔 많은 외계인 문명이 존재한다. 어떤 문명은 역사가 유구하여 지구인의 상상을 크게 초월했는데 그들이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시간은 지구 시간으로 계산하면 30억년 이상이다. 외계 문명의 과학기술도 인류를 훨씬 초과하여 불가사의할 정도로 높다. 하지만 역사가 아무리 유구한 외계문명도 그들의 과학기술이 일정한 정도에 이르면 더 진보할 수 없었다. 제일 주요한 점은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했다 해도 그들의 수명은 일정한 연한이 되면 죽게 된다는 것이다. 즉 어떤 과학기술 수단으로도 한 생명의 수명을 연장할 수 없었다.
  
사실 외계인은 바로 지혜와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동물이지만 그들 사회에는 과학기술만 있지 문명은 없었다. 당신은 반드시 외계인 그곳엔 미술, 음악, 문학과 철학, 더욱이 도덕 규범과 신에 대한 신앙이 없다는 것을 생각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외계인이 지구를 발견한 후 지구인의 신에 대한 신앙은 정확한 것이며 그들의 과학기술을 훨씬 초월한 것을 발견했다.

많은 사람들은 외계인의 과학기술이 그렇게 발달했으면 그들이 지구에 온 의도가 궁금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람이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당신에게 알려주겠다. 그들이 탐낸 것은 바로 지구인의 문화와 예술이며 사람이 신에 대한 신앙을 배우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의 인류사회엔 사람을 놀랄 정도로 많은 외계인이 잠복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외계문명에서 왔는데 그들의 과학기술의 발전 정도 및 걸어온 과학기술의 길은 천차만별이다. 그들이 지구에 온 목적은 다 같은 것으로 바로 문화예술과 사람의 도덕 규범, 그리고 사람의 신에 대한 신앙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이런 외계인은 그들의 과학기술을 인류에게 누설해 주기도 했다. 현재 소위 말하는 첨단기술, 예를 들면 핵폭탄, 컴퓨터, 클론 등 99%이상은 모두 이런 외계인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점을 어떤 사람은 벌써 알고 있다. 미국과학기술이 왜 그렇게 발달했는가? 바로 그들이 한 외계인의 비행선을 얻어 외계 과학기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외계인이 갖은 방법을 다해 신불을 신앙하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동물이기에 신은 그들을 제도하지 않는다. 외계인은 그들의 별나라에 지구인이 세운 것처럼 규모가 거대한 교회, 사찰 및 신불 조각상을 세웠지만 신불은 그들을 제도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많은 외계인은 지구에 와 인류로 위장하여 인류를 따라 배워 신불이 그들을 제도해 주기를 바랐다. 이는 아주 풍자적이지 않는가?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외계인은 있는 힘을 다 해 신불을 믿으려 하지만 원래 신을 신앙하던 지구인은 오히려 외계인의 과학기술을 신앙하고 있다.
  
그럼 외계인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또 어떻게 인류사회에 숨어 있을까? 외계인은 보편적으로 형태가 아주 추하다.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 아주 추하다. 그들 개념에는 인류처럼 추한 것과 아름다운 것의 구별이 없지만 외계인은 또 영화에서 나오는 그런 모양은 아니다. 큰 머리, 큰 눈, 가늘고 긴 목을 상상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외계인의 신체는 낙지와 카멜레온과 같다. 그들 신체 형태, 색은 환경에 따라 무엇이나 변화할 수 있기에 지구에 온 후 그들은 지구인 모양으로 변해 당신을 미혹시킨다. 외모로만 봐서 당신은 분별하기 어렵다. 물론 외계인들 중에는 좋은 것도 있어 진심으로 인류 고대 문화예술을 배우려고 하지만 극히 적다. 내가 만난 이 둘은 괜찮은 편이었다. 외계인에 대해 이만큼 말하겠다.

우당산을 떠난 후 나는 한 가지 문제를 생각했다. 어디에 가면 법을 구할 수 있을까? 석가모니 부처의 법이 안 되고, 도가의 법도 안 되는데 대승 불교의 법은 어떨까? 우리 소승불교의 관점에 따르면 대승불교는 응당 ‘부불외도(附佛外道)’로 그들 속의 모든 법문은 모두 부불외도다. 예를 들면 정토종(淨土宗), 그들은 아미타불의 법호를 외우기만 하면 극락세계로 가는데 이는 석가모니 부처가 전한 계(戒), 정(定), 혜(慧)와는 아무 관계가 없기에 석가모니의 법이 아니다. 또 밀교(密宗)는 신(身) , 구(口), 의(意)를 수련하며 남녀쌍수가 있고 대일여래를 모시기에 계, 정, 혜와 별개다. 율종(律宗)은 200여 개 계율을 제정했는데 많은 계율은 사조가 전한 것이 아니기에 이것도 외도다. 선종(禪宗)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석가모니부처는 49년 동안 법을 전하면서 종래로 승려에게 무예를 가르친 적이 없으며 달마가 선종을 창립했을 땐 사조가 이미 열반한지 1000여 년이 됐기에 선종은 더욱 부불외도다. 대승불교 중의 법문은 하나하나 말하지 않겠다. 아무튼 어떻게 됐던 그들은 모두 부불외도로 모두 석가모니부처의 계, 정, 혜와 별개다.
  
하지만 사조는 종래로 “외도”가 불법이 아니라고 말한 적 없으며 더욱이 “외도”가 사법이라 말하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사조가 전한 계, 정, 혜는 팔만사천 법문 중의 하나임을 깨달았다. 대승불교 중의 그런 수행법문이 전한 것도 불법으로 응당 부처 수련의 팔만사천 법문 중의 하나로서 다만 석가모니부처가 전한 것이 아닐 뿐이다. 석가모니부처가 전한 법은 그 자신이 불법에 대한 증오(證悟)로 얻은 것으로 불법의 전부는 아니다. 지금은 말법시기라 만마(萬魔)가 세간을 교란하고 요괴가 횡행하고 외계인도 온 거리에 꽉 차 있다. 정과만 얻으면 외도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나는 대승불교의 4대 도량, 소위 말하는 불교 4대 명산을 고찰하기로 했다.
  
나는 이 글을 보고 있는 많은 사람이 웃거나 욕하면서 내 말을 믿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는 다 정상이다. 과거에는 웃지 않으면 도가 아니라고 했는데 지금은 이미 욕하지 않으면 도가 아니다가 됐다. 하지만 불법은 허위적이 아닌 진실한 존재다. 나는 두 가지 예를 들겠는데 “미신”이라고 떠드는 사람들이 입을 다물 것이다. 하나는 사리이고 다른 하나는 육신보살이다.
  
당신은 사리를 결석이라 말하지 말라. 왜 불문의 고승이나 부처를 믿는 거사만이 화장을 하면 사리가 있는가? 그 사리는 왜 불에 타지 않을까? 어떤 과학자는 사리 성분을 몇 년 연구했지만 그 속의 오묘함을 연구해 내지 못했다. 화장한 일반인은 억 단위인데 왜 사리가 하나도 없을까? 그 불문의 고승은 열반한 후 육신이 썩지 않는데 어떻게 해석할까? 당신은 해석할 수 없지만 억지를 부리며 신불의 존재를 승인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선의적으로 당신에게 알려주겠다. 옛날에 범진(范縝)이라는 저명한 무신론학자가 있는데 죽은 후 지옥에 갔다. 지옥에서 천년의 고통을 받은 후 연옥에 갔는데 그것은 지옥보다 더 무서운 곳이다. 지금까지도 그는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아마 영원히 환생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내가 천안으로 본 정황이다. 사람은 조심해야 한다. 나는 누굴 속이려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지옥에 가던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나는 다만 선의적으로 당신을 깨우칠 뿐이다. 당신이 신불을 믿지 않더라도 다른 생명의 신앙을 존중해 주길 바란다. 당신이 당신의 과학을 신앙할 수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신불을 신앙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은 당신을 강제로 어떻게 하라고 하지 않았는데 당신이 알지 못한 사실에 대하여 입만 열면 욕하고 비웃지 말라. 사실 당신이 나를 욕한다 해도 나는 개의치 않으며 마음에 두지 않지만 당신은 이렇게 큰 죄업을 감당할 수 없다. 정말 감당할 수 없다. 나는 정말 당신을 위해서 한 말이다.
  
나는 이 글을 보는 사람 중엔 불교의 거사도 있고 마음에 아직 선한 일념과 불성이 있으며 불법을 확고하게 믿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기에서 나는 불법을 감히 해석하거나 더욱이 불법에 감히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과시하려는 마음에 불경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불법을 함부로 논하는데 이것도 끝없는 죄업을 쌓는 것이다. 꼭 기억하라! 꼭 기억하라! 여기에서 나는 나 자신의 경력으로 불법에 대한 개인 증오(證悟)를 말하겠는데 당신에게 참고가 되길 바란다.

1993년 4월 중순, 나는 두 외계인을 데리고 행각하여 산시 오대산에 이르렀다. 오대산은 문수보살의 도량이다. 하지만 산에는 절이 아주 많았고 종파가 많았다. 선종, 밀교, 천태, 화엄이 다 있었다. 내가 오대산으로 간 목적은 선종의 청양사를 고찰하기 위함이었다. 그날 아침 일찍 나는 판츠(繁峙)현에서 출발하여 도보로 오대산으로 향했다. 백리도 되지 않은 길이기에 나의 보행속도로는 응당 날이 저물기 전에 도착했을 것인데 길에서 어떤 일에 봉착해 나의 노정은 지체되었다.
  
당시 정오 즈음 나는 한 마을에 도착하여 탁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한 집에서 개를 잡고 있었다. 그 개는 일반 누런 개였다. 나무에 묶여 가련한 모양을 하고 있었고 약 30~40근이 돼 보였다. 개를 잡으려는 사람은 40살 좌우의 건장한 사나이다. 내가 천안으로 보니 이 건장한 사나이는 전생에 들개고 죽게 된 노란 개는 바로 전생에 그를 죽인 원수다. 이는 전생에 진 업을 갚기 위해 이 생에서 노란 개로 태어나 이런 봉변을 당함으로써 원한을 푸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일을 나는 관계하지 않는다. 내가 자비롭지 않음이 아니라 이는 숙원으로 이루어진 일로 응당 이렇게 돼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관계하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관계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이 건장한 사나이가 개를 달아매고 찬물로 이 개를 질식해 죽이려 할 때 한 할머니가 나타나 백 위안으로 누런 개를 사 고통을 받지 않게 하려 했다. 그런데 건장한 사나이는 동의하지 않고 꼭 이 누런 개를 죽이려 했다. 할머니는 포기하지 않고 돈을 200위안으로 올렸지만 이 사나이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돈 문제가 아니고 이 개를 죽여 고기를 먹어야 자신의 속이 풀리겠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말을 잘 하는 편이 아니라 이 사나이를 설득하지 못하고 돈만 자꾸 올려 이 사나이 마음을 움직여 보려 했다. 마지막에 할머니가 천 위안까지 올려서야 그 사나이는 노란 개를 풀어주겠다고 동의했지만 현금을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할머니는 두말없이 집에 돈을 찾으러 갔다. 1993년 산시 시골은 그다지 부유하지 않아 천 위안은 작은 돈이 아니었다. 할머니가 이 누런 개를 구하는 전 과정에서 나는 그녀의 선량한 마음을 보았다. 그건 정말로 금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누런 개를 구한 후 할머니는 개를 마을 밖에 끌고 가 방생하려 했는데 내가 할머니를 말렸다. 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하지 말고 누런 개를 집에 데리고 가 이 개가 죽을 때까지 키우라고 알려 주었다. 내가 이렇게 할머니에게 권한 것은 누런 개의 운명은 그렇게 배치돼 생명은 이미 죽을 때가 됐는데 할머니의 간섭으로 개가 죽지 못하게 되면 할머니는 반드시 개의 남은 생명 노정에 전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런 개가 이후에 한 모든 죄업은 모두 할머니가 한 것으로 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누런 개가 사람을 물었다거나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쳐 먹었다거나 혹은 다른 동물의 생명을 해쳤다면 이 죄업은 모두 할머니한테로 가게 되기 때문이다.
  
옛말에 좋은 사람이 되려면 끝까지 해야 하고 부처를 바래주려면 서쪽까지 바래줘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일반인은 그 속의 진정한 함의를 이해하지 못한다. 사실 이는 당신이 좋은 일을 하려면 반드시 시작이 있고 결말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끝까지 책임져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좋은 일을 절반 하고 관계하지 않아 최후 결과가 나쁜 일로 변한다면 당신의 죄업은 증가 할 수 있다. 지금 소위 부처를 믿는다는 많은 사람들이 해마다 방생 활동을 하면서 공덕을 쌓아 복을 받는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아주 어렵다. 무엇 때문인가?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큰 가물치를 연못 방생하면서 그도 공덕을 쌓는다고 말한다. 나는 그가 공덕을 좀 쌓을 수도 있겠지만 이로 인한 죄업은 더 클 수 있다고 본다. 당신이 생각해 보라. 그 큰 가물치는 연못에 있는 작은 고기들을 다 먹어 버리지 않겠는가? 이는 호랑이를 산에 돌려보내 줌과 무슨 다들 바 있는가? 좋은 일을 함에 있어서 반드시 이성적이고 지혜롭게 해 결과를 생각하고 앞뒤를 재면서 해야 한다. 좋은 일을 하기 위해 좋은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속이고 남을 기만하는 것으로 된다.
  
어떤 사람은 아마 의문이 있을 것이다. 누런 개의 생명이 이미 다 됐으면 왜 할머니가 개를 구한 후 그는 바로 죽지 않는가? 신은 사람의 선념(善念)을 보호하기 위해 누런 개 생명을 좀 연장해 준다. 하지만 길지는 않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칼끝에서 한 생명을 구했는데 돌아서니 죽어버린다면 이후 누가 또 좋은 일을 하려 하겠는가?
  
후에 할머니는 나의 건의를 받아들이고 또 누런 개를 집으로 데려가 키웠다. 할머니의 이 자선 행위는 공덕이 무량한 것으로 그의 노력과 지불로 한 단락 원연(怨緣)을 좋게 풀어 한차례 살육을 감소했다. 이것이 바로 불성이 나타난 것으로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부분이다. 나는 계속 오대산으로 향해 가 날이 저물어서야 오대산 기슭에 도착했다. 오대산은 주위가 500리로 나는 청양사가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지 몰랐기에 길 옆 한 마을을 찾아 마을 사람에게 청량사 가는 길을 물으려 했다.
  
당시 내가 마을에 들어서자 한 마을 사람이 다가와 그들 마을에 사는 모 생불(生佛)을 찾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나는 청량사를 찾으러 왔지 모 생불을 찾으러 온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마을 사람은 모 생불이 바로 오늘 승천해 많은 라마, 스님이 송별하러 오기에 나도 모 생불을 송별하러 온 줄 알았다고 말했다. 마을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나도 마음이 동해 이 생불이 어떻게 승천하나 보고 싶어 그 생불의 거처를 알려달라고 했다.
  
이 생불은 마을 변두리에 있는 작은 절에 살고 있었는데 내가 도착해 보니 절 주위엔 이미 몇 백 명의 라마와 스님이 모여 있었다. 당시 이 생불은 절 앞의 돌 위에 좌선해 앉아 있었다. 몸에는 붉은 색 가사를 걸치고 눈을 감고 손에는 염주를 들고 있었는데 70~80세 돼 보였다. 내가 도착하자 이 생불은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이 나를 보고 있어 나는 놀랐다. 예의상 나는 합장을 하고 예를 올렸다.
  
이 생불은 살짝 머리를 끄덕이고 그도 나를 향해 합장을 함과 동시에 사유전감(思維傳感)으로 나에게 정보를 보냈다. 뜻은 대충 그는 밀교에서 마지막으로 수행해 도를 얻은 사람인데 이후로 밀교는 세간에 전해지지 않을 것이며 세상 사람들은 더 이상 밀교의 법으로 제도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내가 법을 얻기 위해 오대산으로 온 것을 알고 있다면서 오대산엔 이미 구할 “법”이 없다고 했다. 내가 대승불교의 법은 사람을 제도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 생불은 “대승불교의 법뿐만 아니라 창세해서 인류사회에 전한 모든 종교 및 비밀리에 전해진 법문은 모두 말법에 이르러 전할 법이 없는데 사람을 제도함을 어찌 논하겠는가” 라고 했다. 나는 매우 실망하여 어디에 법이 있으며 중생은 또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 생불은 말법난세에 사악한 요괴가 정권을 잡고 세인들을 미혹하여 원래 구할 길이 없지만 하늘이 자비로워 이미 사람을 제도하는 사람이 세간에서 중생을 널리 구도하고 세인을 교화하고 있어 인연 있는 사람, 선한 마음이 아직 있는 사람은 자연히 법을 얻고 제도 받을 것이라 말했다.
  
여기까지 말하고 생불은 나와의 정보를 마치고 수인을 하기 시작했다. 아주 아름다운 각종 수인, 응당 밀교의 비밀리에 전해진 대 수인이지만 나는 알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천안으로 생불이 수인을 할 때 무수한 금색 연꽃이 하늘에서 내려와 절 주위에 떨어짐을 보았다. 이 수인은 십 몇 분을 했다. 마칠 때 생불 주위에는 눈부신 붉은 빛을 발사했는데 그 빛은 매우 강해 하늘까지 닿았다. 강한 빛은 약 5~6분을 계속한 뒤 생불은 긴 무지개로 변해 하늘로 날아갔다. 생불이 앉았던 자리엔 많은 사리가 남아 있었는데 몇 백 개는 되는 것 같았다. 색깔은 홍, 황, 백 세 가지였고 큰 것은 복숭아만 했고 작은 것은 쌀알만 했다.
  
천리를 마다하고 오대산에 와 법을 얻지는 못했지만 한 밀교의 大라마가 “법사”로 된 것을 본 것도 나의 기연이 옅지 않음을 설명한다. 다만 아주 유감스러운 것은 밀교의 법, 대승불교의 법은 모두 이미 말겁에 이른 것이다. 보아하니 나는 계속 행각해야 했다. 오대산을 떠난 후 이 몇 년간 나는 중국의 모든 명산대천을 다녔고 많은 인간세상 밖의 청수지사를 만났으며 또 나처럼 행각하면서 법을 찾는 사람도 만났으며 많은 대도시도 다 다녔다. 예를 들면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선양, 우한, 선전, 난징 등을 모두 갔었다. 그 총망한 사람들 속에서 아마 당신과 나는 어깨를 스치며 지나갔을 수도 있지만 당신은 주의하지 않아 모를 수 있다.

이렇게 많은 해를 지나 수만 리를 걸어오면서 세간에서 느낀 감수는 현실적 유혹이 너무 크고, 요괴도 너무 많아 신불을 믿는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고 지금의 세인들은 이미 좋고 나쁨, 선과 악, 추한 것과 아름다운 것 이런 제일 기본적인 것도 분별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나 역시 많은 사람들이 애써 노력하며 발버둥치고 있는 것도 보았다. 그가 세간 미혹 속에서 방향을 찾지 못하고 희망은 보지 못해도 집에 가는 길(返本歸眞)을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불경을 알아보지 못해도 불경을 들고 보길 좋아했고 많은 사람들이 과학을 신앙한다고 하지만 몸에는 신불 조각상을 달고 다니고 또 어떤 사람은 절에 가 부처를 공경하길 좋아했다. 그들이 부처에게 구하는 것은 그들의 현실 이익이긴 했지만 필경 그들 마음속에 부처가 있었다. 그 선량한 뿌리가 아직 죽지 않아 마음속 깊은 곳에 사람들은 자신이 왜 이 험악한 인간세상에 태어났는지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나는 또 많은 불교의 거사를 만났었는데 그들은 나에게 어떻게 불법을 수행하는가 물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참선하고 좌선하길 좋아하지만 앉으면 온 머리에 통제할 수 없는 혼란한 사유로 꽉 차 정말로 기세가 대단했고 만 마리 말이 달리는 듯해 아예 조용해 질 수 없었다. 그들은 그것의 원인과 어떻게 해야 그런 마음의 잡념을 없앨 수 있는지를 물었다. 또 어떤 사람은 많은 돈을 들여 집에 불당을 세우고 불상을 청해 아침 저녁으로 향을 피우고 모시면서 날마다 절을 하면서 예의를 올리지만 그들이 겁난을 받을 때 부처가 나타나지 않고 어떤 개시와 점화도 해 주지 않는다면서 왜 부처를 모셔도 효험이 없는가를 묻는다. 여기에서 나는 내가 천안으로 본 진실한 사실을 말하겠는데 혹 당신이 왜 부처가 인간의 손을 놓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반세기를 내려 오면서 99% 중국인은 소학교 때부터 소선대에 참가할 것을 요구하고 중학교에선 단원에 들게 하며 사회에 진출하면 이익 유혹에 어떤 사람은 당에 참여한다. 무릇 이상의 어떤 조직에 가입했던 간에 수속을 밟을 땐 그들은 가입자에게 이 조직에 자신의 생명을 바치겠다는 독한 선서를 하게한다.

여기에서 나는 이 조직이 신앙하는 사상이 무엇인가 묻겠다. 나는 당신이 알 것이라 믿는다. 무신론이다. 바로 신불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론이다. 당신들은 문화혁명시기에 “낡은 네 가지를 타파하자”는 운동을 알 것이다. 바로 어떤 당이 절, 수도원을 다 철수시켰다. 불상, 신상을 모두 부수고 태우며 중, 비구니, 도사, 수도사를 모두 강압적으로 사원, 사당, 궁, 관에서 쫓아낸 것이다. 혹 당신이 이런 일을 잘 모를 수 있지만 집에 가 노인에게 물으면 그들이 당신에게 당시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어떤 당이 어떤 일을 했는지 알려줄 것이다.

물어보겠는데 생명을 무신론 조직에 바치겠다고 맹세한 사람이 또 경을 읽고 참선하고 부처를 모시면서 부처에게 보호해 줄 것을 빈다면 이는 어떤 행위인가? 이는 양면파(兩面派, 말과 행동이 다른 두 얼굴의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신성하고 위대한 부처가 이런 양면파에게 개시해 줄 수 있겠는가? 없다. 인간세상에서도 양면파면 수치스럽고 비천한 행위다. 이런 이치가 아닌가? 99% 이상 중국인이 모두 거짓에 속아 이런 조직에 가입했기에 신불도 사람의 손을 놓고 떠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말법시대에 이르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며 사악한 마귀가 정권을 잡고 만마가 세상을 어지럽히게 된 진정한 함의다.

무엇이 마(魔)인가? “세뇌식 뉴스 선전”과 “주입식 교육 체제”, 거기에 “폭력 위협”과 “이익으로 유혹하여 기만”하는 방법으로 사람들의 “선념(선량한 의념)”을 타격하면서 좋고 나쁨을 뒤집으며 폭력 투쟁 철학을 선양하고 무신론을 선양하는데 그것이 마가 아니고 뭔가? 당신이 냉정하고 이지적으로 생각해 보라 내가 말한 것이 틀리는지?

신불이 사람을 관계하지 않으면 마가 사람을 관계한다. 그들은 공손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천안으로 본 것은 3가지 조직에 든 사람들은 단전과 니환궁에 모두 마의 봉인이 찍혀 있어 당신이 어떤 공법을 수련하던 어떤 신불을 신앙하던 모두 진정하게 작용을 일으키지 못한다. 신불도 당신을 관계하지 못하며 또 관계할 수도 없다. 그건 당신이 자신의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바치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에 신불은 강제로 당신을 관계할 수 없다. 억지로 관계하면 나쁜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이 몸에 마의 도장이 찍히면 백년 후 어디로 가겠는가? 지옥 외 어디에서도 받아주지 않는다!

어떻게 당신의 단전과 니환궁의 봉인을 지울 것인가? 아주 간단하다. 당신이 진심으로 앞에서 말한 이 세 가지 조직을 탈퇴하면 된다. 사람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신불도 어쩔 수 없다. 사람 마음이 움직여 사람의 선념이 나오기만 하면 시방세계를 진동한다. 부처는 대자대비하며 대 지혜의 신이다. 불법은 금강불괴, 원용하여 파괴되지 않는 진리기에 당신의 인과를 끊을 수 있으며 당신의 단전과 니환궁의 봉인을 제거할 수 있다. 아무리 어려워도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다. 믿기 어려우면 한번 실험해 보라. 그런 후 당신이 신에게 빌고 부처를 모신다면 반드시 다른 감수와 효과가 있을 것이다. 반드시!

어떤 사람은 내가 정치에 참여한다고 질책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흐리멍덩하다고 본다. 나는 사람들에게 정치에서 탈퇴할 것을 권하고 아직 불성이 있고 선념이 있는 사람, 아직 집으로 돌아 갈 희망이 있는 사람들에게 정치에서 탈퇴할 것을 권해 그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부처를 향하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깨달아 추구할 것이 없는 사람이며 신통력이 다 구비 되어 세속의 권세는 나에겐 아무 의미가 없으며 정치에 아무 요구 사항이 없는데 내가 정치를 해서 뭐 하겠는가? 이런 도리가 아닌가? 나는 단지 아직 선량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마지막 불성으로 악마의 손에서 벗어나길 바랄 뿐이다.

글/ 행각승(미얀마 사찰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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