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란 무엇을 뜻하는가 -법륜스님
사람은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저마다 다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실제의 삶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행복하고 싶지만 현실은 행복하지 않고,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하지만 그 권리를 행사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각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행복하지 않다고 하는 사람에게 제가 '무엇이 문제인가요?' 라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아이가 말을 안 들어서 괴로워요', '남편이 매일 술 마셔서 남편 때문에 괴로워요', '직장 상사가 매일 화를 내서 괴로워요' 이런 이유들을 대답합니다.
이렇게 자기의 괴로움을 모두 남 탓이라고 해요.
이럴 때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아이가 내 말을 잘 들어야 하고, 남편이 술을 안 마셔야 하고, 직장 상사가 화를 안 내야 합니다.
이 말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행복하다는 뜻이지요?
"네!" (청중)
그런데 이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될까요? 만약 원하는 대로 되어야 행복하다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괴로울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원하는 대로 될 때는 즐거웠다가 또 원하는 대로 안 될 때는 괴로웠다가 합니다.
즉, 즐거움과 괴로움 사이를 왔다 갔다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윤회(輪廻)'라고 합니다.
죽어서 욕심이 많으면 돼지로 태어나고, 미련하면 소로 태어나고, 독한 마음을 먹으면 독사로 태어나는 것을 윤회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욕구가 충족될 때 즐거워하고, 충족되지 않을 때 괴로워하는, 이 고와 락 둘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을 윤회라고 하는 겁니다.
욕구를 따라가면 반드시 과보(果報)가 생깁니다. 반면 욕구를 억제하면 스트레스가 쌓여요.
예를 들어, 화가 난다고 화를 내버리면 주변 사람이 나를 떠나는 등 그에 따른 과보가 생깁니다.
그렇다고 화를 안 내겠다고 참으면 이번에는 내가 스트레스 받아요. 그러니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입니다.
대개 우선 성질대로 했다가, 그래서 미움을 받게 되면 그 다음에는 참는 방향으로 갑니다.
그런데 참는다고 해봐야 두 번밖에 못 참고 세 번째에는 터집니다.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하면서 터지거나, '이게 한두 번도 아니고!' 하면서 터지고 맙니다. (청중 웃음)
그래서 세 번을 잘 못 넘겨요. 마음먹은 일도 3일을 잘 못 넘긴다고 해서 '작심삼일'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렇게 두 번 참았다가 세 번째 못 참고 터뜨리고 나면 그 부작용이 크니까 '다시는 안 해야지' 하고 후회하고 다짐합니다.
그 다짐으로 참다가 또 언젠가는 터뜨리고 후회하고, 터뜨리고 후회하고를 되풀이 하게 됩니다.
그러니 어떤 욕구가 일어날 때에는 따라가거나 참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알아차릴 뿐'이어야 해요.
'아, 지금 나에게 이런 욕구가 일어나는 구나' 하고 그 욕구를 알아차리면, 거기에 끌려가지도 않고 억제하지도 않게 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욕구와 마주치면 대개 따라가든지 참든지, 두 가지의 길 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가령 명상을 하다가 다리가 아프면 다리를 펴든지 참든지 둘 중 하나를 해요.
그런데 '알아차림'이라는 것은 그렇게 다리에 통증이 생길 때 '다리에 통증이 있구나'하고 통증을 느끼고 알아차리는 거예요.
통증이 싫다고 다리를 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통증을 억제하지도 않는 거예요.
물론 현실에서는 잘 안 됩니다. 그래서 연습이 필요한 거예요.
이렇게 욕구에 끌려가지도 않고 욕구를 참지도 않는 제 3의 길이 '중도(中道)'입니다.
욕구를 따라가는 쾌락주의도 아니고, 욕구를 억제하는 고행주의도 아닌, 이 새로운 길이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중도'예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제자들에게 하신 첫 번째 말씀도 '수행자는 쾌락의 길을 가도 안 되고, 고행의 길을 가도 안 된다. 양 극단을 버리고 중도의 길을 가라' 였습니다.
이런 중도의 길은 즐거움과 괴로움을 윤회하지 않는 지속가능한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기분이 좋을 때 마음이 들뜨나요, 가라앉나요?
"들떠요." (청중)
화가 나도 마음이 들뜹니다. 기분이 좋을 때나 화가 날 때가 사실은 같은 거예요. 둘 다 마음이 들뜬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 둘이 계속 되풀이 되는 거예요. 반면 알아차림은 마음이 고요한 상태입니다.
좋다고 들뜨지도 않고, 싫다고 가라앉지도 않는 상태예요.
그런데 대개 그런 경지를 체험하지 못한 채, 기분이 좋아서 들뜨는 것을 행복한 상태라고 생각하고 그 상태가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데 그런 상태는 계속 유지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면 행복한 것이다'라는 가치관을 갖고 있는 한, 우리는 영원히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저 고(苦)와 락(樂)이 되풀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가치관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이 가치관의 전환을 다른 말로 출가(出家)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까지 살아온 집의 가치관, 즉 고와 락 중, 락만을 바라는 가치관을 버리는 것입니다.
락만 갖기를 바라지만 락에는 필연적으로 고가 따릅니다.
그래서 괴로울 때는 집을 나갔다가 또다시 편안함을 그리워하면서 집으로 들어오고, 그렇게 나갔다가 들어오고를 반복합니다.
이런 건 가출이라고 해요. (청중 웃음)
'고와 락의 되풀이'를 불살라 버리는 것, 그런 기존의 가치관을 집이라고 대변하여 '집을 불살라 버리는 것'을 '집을 떠난다, 출가했다'라고 표현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절에 들어와도 스님이 볼 때에는 열에 아홉은 출가가 아니라 가출을 하는 것 같아요. (청중 웃음)
집이 싫어서 나왔다가 절에서 살기 힘들어지면 다시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돌아갔는데 귀찮아서 못 살겠으면 다시 나옵니다. 이렇게 나왔다 들어갔다가 하는, 이런 오고 감은 '가출'입니다.
여러분들은 괴롭다고 할 때 대개 '무엇 때문에 괴롭다'라고 말하는데, 그 가치관을 붙들고 있는 한 지속가능한 행복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탓을 하기 시작하면 여름에는 더워서, 겨울에는 추워서, 봄에는 알레르기가 있는데 꽃이 펴서 괴롭다는 등 날씨부터 온갖 것을 다 탓하고 살게 됩니다.
그런데 관점이 탁 바뀌면 여름에는 수영을 할 수 있어서 좋고, 겨울에는 스키를 탈 수 있어서 좋고, 봄에는 꽃구경을 해서 좋고, 가을에는 단풍 구경을 할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날씨에 따라 내 마음이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에 긍정적으로 대응을 하게 됩니다.
즉, 욕구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니 훨씬 더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거예요.
그런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 출가이지, 꼭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는 것만이 출가가 아닙니다.
자기의 기존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의 길로 나아간다면 출가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아무래도 세속에서 살면 자꾸 옆 사람과 비교해서 시류를 따라가기 때문에 이렇게 되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초심자일수록 세속으로부터 일정 기간 격리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다음에는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을 나눌 필요가 없어집니다.
어디에 있어도 늘 알아차림을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법륜 스님은 왜 출가하셨나요? 출가하실 때 주변 사람들의 반대는 없었나요?"
저는 원래 과학자가 되는 게 꿈이였어요.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 때였어요.
현재 저의 스승님이 되시는 불심 도문 스님께서 저를 부르셨어요. 이 분은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하시면 3~5시간씩 말씀을 하신단 말이죠.
마침 다음 날 시험이 있었는데, 그 날은 스님께 붙잡히면 큰일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스님께서 부르시자마자, 제가 "스님, 저 오늘 바쁩니다" 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스님께서 '어, 그래?" 하시더니 "너 어디서 왔어?" 하고 되물으셨어요.
그래서 "학교에서 왔습니다" 라고 대답했더니 "그 전에는?" 하고 또 물으셨어요.
그렇게 "그 전에는?" 하는 문답을 계속 주고받다가 결국 제 대답이 "어머니 뱃속에서 나왔겠죠" 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 다시 "그 전에는?" 하고 물으셨어요. 그래서 제가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하고 대답했지요.
그랬더니 스님께서 이번에는 "너 지금 어디갈거니?" 하고 물으셨어요.
그래서 "도서관이요" 하고 대답하니 "그 후에는?" "학교요" "그 후에는?" "집이요"
이렇게 "그 후에는?"하는 문답을 계속 주고받다가 결국 제 대답이 "그 후에는 죽겠죠" 까지 갔습니다.
이번에도 스님께서 "그 후에는?" 하고 한 번 더 물으셨어요.
그래서 제가 "몰라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스님께서 갑자기 "야 이놈아,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놈이 바쁘기는 왜 바빠" 라고 벽력같이 고함을 치셨어요.
요점은 이렇습니다. 스님께서 부르시자마자 제가 바쁘다는 말씀부터 드렸잖아요. 바쁘다고 하면 적어도 어디로 갈지는 알고 바빠야 하는데 스님께서 질문 몇개를 던지고 나니 제 대답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고, 또 결국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고 나온 거예요.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이치에 맞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저한테도 이 질문이 남게 되었어요. 분명히 내 입으로 바쁘다고 했는데, 왜 바쁜지 물어보니 또 내 입으로 모른다고 했어요. 그래서 스님께 "그걸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고 여쭈었더니 도리어 "어떻게 그걸 모르고 살아가느냐? 라고 하세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습니까?" 했더니 "절에 들어와" 라고 하셔서 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어느 날 저희 어머니꼐서 제가 절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절로 찾아오셨어요. 오셔서 스님께 울고불고 항의를 하신 거예요.
어머니 말씀은 고등학교라도 졸업을 하면 그 때 데려가시지 어쩜 이렇게 어린 아이를 데려가느냐는 요지였어요. 그랬더니 스님께서 그러셨어요.
"보살님!" "네" "이 아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아요?" "아니요" "저는 알아요. 그러면 아는 사람이 아이를 지도해야겠어요, 모르는 사람이 지도해야겠어요?"
"아이고, 그야 아는 사람이 지도해야죠"
이렇게 어머니께서는 스님께 일단 기가 꺾이셨어요. 그런데 어머니도 궁금하셨을 거잖아요? 그래서 어머니께서 "얘가 어떻게 되는데요?" 하고 물으셨어요.
그랬더니 스님께서 "이 아이는 단명해요" 라고 딱 한마디만 하셨어요. 단명한다는 말은 일찍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는 너무 놀라서 "아이고, 그럼 스님 아들 하세요" 하고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저는 집안 문제가 이렇게 잘 정리되었습니다. (청중 웃음)
저는 도를 이루겠다고 출가를 한 것도 아니고, 대학을 가려고 출가한 것도 아니고, 실연을 당해서 절에 들어온 것도 아니고, 돈을 벌려고 들어온 것도 아니었어요.
인생이 궁금해서 들어왔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어머니와의 정을 끊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그러다보니 절에 들어와도 신통력 같은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오히려 신비한 것은 왜 우리가 심리적으로 신비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탐구를 해봤어요.
그리고 결국 신비하다는 생각은 우리가 어떤 현상에 대해 왜 일어나는지 원인을 모를 때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예를 들어, 비행기가 날아가는 것은 신기해하지 않는데 앉아있는 사람이 갑자기 뜨는 것은 신기해하잖아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원리를 모르기 때문이예요. 인간에게 두려움은 왜 생길까요? 마찬가지로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즉, 무지(無智)때문에 생겨나는 거예요.
이렇게 탐구하는 자세로 부처님의 일생이나 부처님의 법문을 공부하면, 붓다야 말로 모든 것에 대한 탐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처음에는 조금 억지로 출가한 면이 없지 않은데 시간이 갈수록 적성에 맞았어요. (청중 웃음)
-법륜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