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한암(方漢岩) 큰 스님은 조선조 말 1876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나
22세 때 우연히 금강산 구경길에 나섰다가 장안사(長安寺) 행름노사를 만나 삭발 출가하였다.
24세 때에 당대 최고의 선지식 경허대선사를 청암사에서 만나 금강경을 배우던 중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忘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니 만약에 모든 상이 상 아님을 안다면곧바로 그 자리에서 여래를 보느니라.
라는 구절에서
큰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개안(開眼)의 기회를 얻었다.
그 후 스님은 해인사, 통도사를 거쳐 평안도 맹산군 도리산에 있는 우두암에서 홀로 참선수행하던 중
아궁이에 불을 지피다가 홀연 큰 깨달음을 얻고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읊었다.
부엌에서 불 지피다/홀연히 눈 밝으니
이로부터 옛길이/인연따라 분명하네
만일 누가 달마스님이/서쪽에서 오신 뜻을 나에게 묻는다면
바위 밑 샘물소리/젖는 일 없다 하리.
이 때 한암 스님의 세속 나이는 35세.
한암 스님이 해인사에서 머물고 계실 때, 스승이신 경허 선사께서 정처없는 만행길에 올라 해인사에 오셨다.
경허 선사는 발길을 다시 북쪽으로 돌려 해인사를 떠나면서 한암을 데리고 가고 싶은 마음에
간절한 글 한 편과 시(詩) 한 수를 지어 한암에게 전했다.
“나는 천성이 화광동진을 좋아하고 더불어 꼬리를 진흙 가운데 끌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다만 스스로 삽살개 뒷다리처럼 너절하게 44년의 세월을 지내다 우연히 한암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선행은 순직하고 또 학문이 고명하여 1년을 같이 지내는 동안에도 평생에 처음 만난 사람인양 생각되었다.
그러나 오늘 서로 이별하는 마당에 서게 되니,
아침 저녁의 연운과 산해(山海)의 멀고 가까움이 진실로 보내는 회포를 뒤흔들지 않는 것이 없다.
하물며 덧없는 인생은 늙기 쉽고, 좋은 인연은 다시 만나기 어려운 즉,
이별의 섭섭한 마음이야 더 어떻다고 말할 수 있으랴.
옛날 사람은 말하기를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차 있지만,
진실로 내 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랴’고 하지 않았던가.
과연 한암이 아니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지음(知音)이 되랴.
그러므로 여기 시(詩) 한 수를 지어 뒷날에 서로 잊지 말자는 부탁을 하노라.”
북해에 높이 뜬 붕새 같은 포부 변변치 못한 곳에서 몇 해나 묻혔던가.
이별은 예사라서 어렵지 않지만 뜬 목숨 흩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으랴.
이 간절한 스승의 글과 시를 받아 본 한암 스님은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스승께 바쳤다.
서리국화 설중매는 지나갔건만
어찌하여 오랫동안 곁에 둘 수 없을까.
만고에 변치 않고 늘 비치는 마음 달
뜬세상에서 뒷날을 기약해 무엇하리오.
그리고 한암 스님은 스승 경허 선사와 헤어졌다.
그러나, 이것이 스승과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이야 어찌 감히 짐작이나 했으랴.
한암 스님께서 한강 건너 봉은사 조실로 계실 때의 일이었다.
한번은 한암 스님께서 강화도 전등사, 보문사 참배길에 오르셨는데,
이 때 시봉을 들고 있던 수좌는 성관이었다.
지금은 드넓은 다리가 두 곳에 놓여서 강화도 가는 길이 편하지만
당시에는 김포와 강화도 사이에는 다리가 놓여지기 전이라 배를 타고 건너다닐 때였다.
우선 김포나루에서 배를 타고 강화도로 건너가서
거기에서 수십리길을 걷고 걸어서 길상면 전등사까지 가자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버렸다.
게다가 비까지 억수로 퍼부었다.
하는 수 없이 남의 집 신세를 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인색하기 그지없는 부잣집이었다.
그 부잣집 주인이 거드름을 피우며 스님께 빈정거렸다.
“스님들은 탁발을 나오기만 하면, 보시하라, 나누어 주어라, 그러시던데,
재산이 좀 있다고 해서 허펑허펑 남에게 퍼주기만 하면 그게 옳은 일이겠습니까?
아니면, 안 쓰고 절약해서 자기 재산을 늘리는 게 옳겠습니까? 어디 한 번 대답을 해보시오.”
이때 한암 스님은 빙긋이 웃으시며 부잣집 주인에게 말씀하셨다.
“주인 어른께서는 오른손을 한 번 펴보시지요.”
“손을 펴라니, 이렇게 손가락을 펴란 말씀이십니까?”
“그렇소이다. 주인장께서 지금 손가락을 쫙 펴셨는데, 그 손가락을 오무리지 못하면, 그것은 불구이겠습니까, 아니겠습니까?”
“그, 그야 편 손을 오무리지 못하면 불구입지요.”
“그럼 이번에는 주먹을 한 번 쥐어보시지요.”
“이, 이렇게 말씀입니까?”
“그렇소이다. 주인장께서 지금 주먹을 꼭 쥐셨는데, 이 손을 펴지 못하면, 그것은 불구입니까, 아닙니까?”
“아, 그야 주먹을 펴지 못하면 그것도 불구입지요.”
“재물도 그와 같다고 할 것입니다.”
“재물도... 그와 같다니요?”
“재물도 덮어놓고 허펑허펑 허비하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니요,
그렇다고 재물을 덮어놓고 움켜 쥐고만 있으면 그 또한 옳은 일이 아닙니다.
손을 펼 때 펴고, 오무릴 때 오무릴 수 있어야 정상이듯이,
재물도 또한 아낄 때는 아끼고, 쓸 때는 제대로 쓸 줄 알아야 옳은 일이라 할 것입니다.”
한암 스님의 법문을 듣고 난 그 부잣집 주인은 그제서야 부끄러워하며 스님을 극진히 모시는 것이었다.
이 때 강화도 전등사와 보문사를 참배하고 봉은사로 돌아오신 한암 스님은
왜색 승려들이 설치는 꼴을 보다 못해 홀연 봉은사를 떠나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로 들어가 동구밖 출입을 끊어버리셨다.
이 때 봉은사를 떠나시면서 저 유명한 한 말씀을 남기셨다.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鶴)이 될 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
1925년 오대산으로 들어가 ‘천고에 자취 감춘 학(鶴)’이 되어버린 한암 큰스님은
1951년 3월 22일 세수 75세, 법랍 54세로 좌탈입망에 드실 때까지 당신의 말씀 그대로 장장 27년 동안 불출동구(不出洞口),
결코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산문 밖으로 나오신 일이 없었다.
1941년 일본불교와 차별화하기 위해 뜻있는 우리 스님들에 의해 창종된 불교교단이 바로 ‘조선불교조계종’이었는데
이때 한암 스님이 초대 종정이 되셨다.
오대산 그대로 들어앉아 계시면서도 초대종정에 추대된 것이었다.
그러자 당시 미나미(南次郞)총독이 한암 종정 스님을 총독부로 초청하였다.
그러나 한암 큰스님은 불출동구를 접지 않고 일언지하에 미나미 총독의 초청을 거절했다.
이에 입장이 난처해진 미나미 총독은 부총독격인 정무총감 오오노를 오대산으로 보내 배알케 했다.
이때 오오노가 한암 큰스님께 법문을 간청하자 스님은 묵묵히 백지 위에 ‘정심(正心) 두 글자만 써주셨다.
그후 경성제대(京城帝大) 교수로 와있던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명승 사또오가 월정사로 한암 스님을 찾아 뵙게 되었다.
큰 절 월정사에서는 급히 한암 스님이 계시는 상원사(上院寺)로 사람을 보내어
한암 스님으로 하여금 월정사로 내려와 사또오 교수를 만나라고 전했다.
그러나 대중들과 김장준비 울력을 하고 있던 한암 스님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할 수 없이 사또오 교수가 상원사로 한암 스님을 찾아뵈었다.
사또오 교수가 스님께 인사를 올리고 나서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佛法)의 대의(大義)입니까?”
스님은 묵묵히 놓여있던 안경집을 들어 보였을 뿐이었다.
사또오가 또 물었다.
“스님은 일대장경과 모든 조사어록을 보아오는 동안 어느 경전과 어느 어록에서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까?”
스님은 사또오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시면서 한말씀 하셨다.
“적멸보궁에 참배나 다녀오게.”
사또오가 또 물었다.
“스님께서는 젊어서 입산하여 지금까지 수도해 오셨으니, 만년의 경계와 초년의 경계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스님은 한마디로 잘라 답했다
“모르겠노라.”
사또오가 일어나 절을 올리며 말했다.
“활구법문(活句法門)을 보여 주시어 대단히 감사합니다.
” 이에 스님께서는 사또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마디 하셨다.
“활구라고 말하여 버렸으니 이미 사구(死句)가 되어버렸군.”
사또오는 이때 상원사에서 3일을 머물다 돌아갔는데
“한암이야말로 일본에서도 찾을 수 없는 큰스님”이라고 극구 칭송하고 다녔다.
그후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한암 큰스님의 도(道)가 보통이 아니라는 소문을 전해들은 일본정부의 경무국장 이께다(池田淸)가
오대산으로 찾아와 한암 스님을 뵙고 한마디 물었다.
“이번 전쟁은 어느 나라가 이기겠습니까?”
순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바짝 긴장했다.
스님께 질문을 던진 사람은 날아가는 새도 떨어트릴 수 있는 일본의 경무국장.
만일 연합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가 이긴다고 대답하면 길길이 날뛸 것이 아닌가?
스님께서는 과연 뭐라고 대답하실 것인가?
그러나 스님은 태연히 말씀하셨다.
“그야 물론 덕(德)이 있는 나라가 이길 것이오.”
스님의 이 대답을 들은 일본의 경무국장 이께다는 더 이상 아뭇소리도 못한채 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오대산을 떠났다.
한암스님은 중국의 한산(寒山)이 한산 깊숙히 들어가 산문 밖으로 평생 나오지 않은 채
저 유명한 '한산시'를 남긴 한산처럼 여전히 오대산 깊숙히 들어앉아 불출동구하며
틈나면 좋아하는 ‘한산시’를 읊조리곤 하셨다.
1943년 봄, 전주 청류동 관음선원의 묵담선사가 한암스님께 실참법문을 내려주십사 간청하자
한암스님께서는 한산시 24편을 손수 써서 보내주셨는데 그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시도 들어있다.
“남을 속이는 자 살펴보니
바구니에 물을 담고 달려가는 격
단숨에 집으로 돌아온들
바구니 속에 무엇이 있을꼬.”
그렇다. 남을 속이고, 자신을 속여가며 직위를 탐내고, 부(富)를 탐내며,
천하의 부귀영화를 향해 미친 듯 달려가지만,
그것들 모두 ‘바구니에 물을 담고’달려 가는 격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한암 스님은 이 한산시를 통해 어리석은 우리 중생들에게 큰 가르침을 내리신 셈이다.
과연, 바구니에 물을 담고 달려간들, 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1951년. 6.25한국전쟁으로 남북이 밀고 올라갔다가, 밀려 내려왔다를 거듭하고 있던 1월.
느닷없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까지 겪어야 했지만,
바로 이 무렵 오대산에서는 밤낮으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한 국군장교가 한 무리의 병력을 이끌고 한암스님과 수좌들이 수행하고 있던 상원사에 들이닥쳤다.
모든 스님들을 절마당으로 모이게 한 뒤, 그 국군장교가 선언했다.
“공비들이 절을 거점으로 암약하므로 오대산에 있는 모든 사찰은 다 불태워 없애라는 명령이 떨어졌소!
이 절도 불태워야겠으니 스님들은 모두 짐을 챙겨 속히 떠나시오!”
이때 한암 스님은 잠시만 말미를 달라고 한 뒤 안으로 들어가서 가사 장삼을 수하시고는
법당으로 들어가 정좌하고 앉으신 채 국군장교를 불렀다.
“이제 준비가 다 되었으니 불을 지르시게.”
국군장교가 소스라치게 놀라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이러시면 안됩니다. 어서 나가시오!”
그러나 스님은 법당 앞에 정좌한채 요지부동이셨다.
“그대는 군인이니 명령을 따르는게 본분이요.
나는 출가수행자니 법당을 지키는게 본분, 둘 다 본분을 지키는 일이니 어서 불을 지르시게.”
국군장교는 범접할 수 없는 한암 큰 스님의 법력 앞에 어쩌지 못한채 부하들에게 기상천외의 명령을 내렸다.
“이 절의 문짝들을 뜯어다 마당에 쌓아라!”
그리고 그 국군장교는 문짝만을 뜯어다 마당에 쌓고 그 위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지른 뒤, 총총히 산속으로 사라졌다.
우리의 자랑스런 고찰, 상원사가 불타지 않은채 오늘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것은
바로 한암 큰스님의 법력 덕분이었다.
한암중원 <일생패궐> 중
내가 스물네 살 되던 기해년(1899) 7월 어느 날 금강산 신계사 보운강회(보운강원)에 있을 적에 우연히 보조 국사의 〈수심결〉을 읽다가,
‘만약 마음 밖에 별도로 부처가 있고 성품 밖에 법(진리)이 있다.’는 생각에 굳게 집착하여 불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비록 이 겁(劫)이 다하도록 몸을 태우고 팔을 태우며 (云云), 또 모든 경전을 줄줄 읽고 갖가지 고행을 닦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마치 모래를 가지고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한갓 수고로움만 더할 뿐이다.
라고 하는 대목에 이르러, 나도 모르게 몸과 마음이 떨리면서 커다란 후회(大恨) 같은 것이 들이닥쳤다. 게다가 장안사 해운암이 하룻밤 사이에 전소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더욱더 무상한 것이 타는 불과 같았다. 그리하여 모든 일(계획)이 다 몽환처럼 느껴졌다.
신계사에서 하안거를 지낸 뒤에 도반 함해 선사와 함께 짐을 꾸려서 행각 길에 올라 점점 남쪽으로 내려가 성주 청암사 수도암에 이르렀다. 그 날 경허 화상의 설법 가운데,
모든 존재는 다 허망한 것이다. 만일 모든 존재가 실존하는 것이 아님을 간파한다면 곧바로 여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고 하는 대목에 이르러 문득 안광(眼光, 혜안의 광명)이 열리면서 삼천대천세계를 덮어 다하니 만나는 것마다 모두가 다 자기 자신 아님이 없었다(한암의 첫 번째 깨달음, 1899년).
청암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경허 화상을 따라서 합천 해인사로 가는 도중에 화상께서 문득 이렇게 물으시었다.
“옛 사람(동산양개)이 이런 말을 하였네. ‘사람이 다리 위를 지나 가네. 다리만 흐르고 물은 흐르지 않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내가 답하였다.
“물은 진(眞)이요, 다리는 망(妄)입니다. 망은 흘러도 진(眞)은 흐르지 않습니다.”
경허 화상께서 말씀하셨다.
“이치로 보면 참으로 그와 같지만, 그러나 물은 밤낮으로 흘러도 흐르지 않는 이치가 있고 다리는 밤낮으로 서 있어도 서 있지 않는 이치가 있는 것이네.”
내가 여쭈었다.
“일체 만물은 다 시작(始)과 끝(終), 본(本)과 말(末)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본래 마음은 탁 트여서 시작과 끝, 본과 말이 없습니다. 그 이치가 결국은 어떠한 것입니까?”
경허 화상께서 답하셨다.
“그것이 바로 원각경계이네. 《경(원각경)》에 이르기를 ‘사유심으로 여래의 원각경계를 헤아리고자 한다면 그것은 마치 반딧불로써 수미산을 태우려고 하는 것과 같아서 끝내는 태울 수 없다.’고 하였네.”
내가 또 여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깨달을 수 있습니까?”
화상께서 답하셨다.
“화두를 들어서 계속 참구해 가면 끝내는 깨닫게 되는 것이네.”
내가 또 여쭈었다.
“만약 화두도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화상께서 답하셨다.
“화두도 진실이 아니라고 알았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네. 그러므로 그 자리(잘못된 그곳)에서 즉시 ‘무(無)’자 화두를 참구하게.”
해인사 선원에서 동안거 중 하루는 게송을 하나 지었다.
다리 아래는 푸른 하늘 머리 위는 산봉우리
쾌활한 남아가 여기에 이른다면
절름발이도 걷고 눈먼 자도 보리
북산(北山)은 말없이 남산(南山)을 대하고 있네.
경허 화상께서 이 게송을 보시고서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각하청천(脚下靑天)과 북산무어(北山無語) 두 구(句)는 옳지만 쾌활남아(快活男兒)와 파자능행(跛者能行) 두 구는 아니다.”
해인사에서 동안거를 지내고 화상께서는 만행길에 올라 통도사와 범어사로 떠나셨지만, 나는 그대로 해인사 선원에 남아 있다가 우연찬게도 병에 걸려 거의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다. 하안거를 지낸 뒤에 곧바로 만행길에 올라 통도사 백운암에 이르러 몇 달 머물렀다. 하루는 참선 도중 죽비치는 소리를 듣고 또다시 개오처가 있었다(한암의 두 번째 깨달음).
동행하는 스님에게 이끌려 범어사 안양암에서 동안거를 지낸 후 다음 해 봄에 다시 백운암으로 와서 하안거를 보내고 있었다. 당시 경허 화상께서는 청암사 조실로 계셨는데, 급히 편지를 보내 나를 부르셨다. 나는 행장을 꾸려 가지고 청암사로 가서 화상을 뵙고 거기서 하안거를 지낸 다음 가을에 또 해인사 선원으로 왔다.(왜 급히 불렀는지는 알 수 없음, 혹 그것도 격외소식인가?)
계묘년(1903) 여름이 되자 사중(寺中, 해인사)에서 화상을 모시고자 청하였다. 화상께서는 그때 범어사에 계시다가 해인사로 오셔서 선원의 대중 20여 명과 함께 하안거 결제를 하셨다.
하루는 차를 마시다가 어떤 수좌가 《선요(禪要)》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여쭈었다.
“무엇이 실참실구(實參實究)의 소식입니까?”
화상께서 답하셨다.
“남산(南山)에는 구름이 일어나고 북산(北山)에는 비가 내리도다.”
그 수좌가 여쭈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화상께서 답하셨다.
“비유한다면 그것은 마치 한 자 되는 자벌레가 한 자를 가고자 한다면 완전히 한 바퀴 굴러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선어 가운데 一轉語와 같다. 즉 妄에서 眞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한마디―역자 주) 그러시고는 대중들에게 묻기를 “이것이 무슨 도리인고?” 하셨다.
내가 답하였다.
“창문을 열고 앉으니 담장이 앞에 있습니다.”
화상께서 다음날 법상에 올라 대중들을 돌아보면서 말씀하셨다.
“원선화(한암중원)의 공부가 개심(開心)의 경지를 넘었구나. 그러나 비록 그 경지가 이와 같지만 아직도 무엇이 체(體)고 무엇이 용(用)인지는 모르는구나.” (이윽고 동산 화상의 법어 가운데 한 대목을 인용하셨다.)
“동산 화상께서 말씀하시기를, ‘늦여름 초가을(해제)에 형제들이 각자 흩어지되 일만 리 풀 한 포기 없는 곳으로 가라.’고 하셨으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겠다. 나라면 ‘늦여름 초가을 형제들이 각각 흩어져 가되 길 위의 잡초를 하나하나 밟고 가야 된다.’고 말하리니, 이 말이 동산의 말과 같은가 다른가.”
대중들이 아무 말이 없자 화상께서 말씀하셨다.
아무도 답하는 사람이 없으니 내 스스로 답하겠다.” 하시고는 아무런 답도 없이 마침내 법상에서 내려 오시어 방장실로 돌아가셨다.(無言, 이것이 대답인가?―역자 주)
하안거를 지낸 뒤 화상께서는 범어사로 떠나셨다. 대중들도 모두 흩어졌으나 나는 병이 나서 다른 곳으로 갈 수가 없었다. 하루는 《전등록》을 보다가 약산 화상이 석두 화상에게 설한 법어 중에 “한 물건도 작용하지 않는다(一物不爲).”고 하는 대목에 이르러 문득 심로(心路)가 끊어지는 것이 물통 밑이 확 빠지는 것 같았다(한암의 세 번째 깨달음).
그 해(1903∼1904) 겨울, 화상께서는 북쪽(갑산)으로 가셔서 잠적하셨다. 그 뒤로는 더 이상 화상을 뵐 수가 없었다.
갑진년(1904) 통도사에서 지내던 중 마침 돈이 생겨 병을 치료했지만 고치지 못했다. 그럭저럭 6년 세월이 흘렀다. 경술년(1910) 봄, 묘향산으로 가 내원암에서 여름철(하안거)을 지낸 뒤 가을엔 금선대로 가서 겨울과 여름 두 철을 지내고 가을(1911)엔 맹산 우두암에서 겨울을 지냈다.
다음해(1912) 봄이 왔다. 함께 살던 도반(사리)은 식량을 구하러 밖으로 나가고 나만 혼자 부엌에 앉아서 아궁이에 불을 붙이다가 홀연히 깨달았다. 그런데 그 깨달은 소식이 처음 수도암에서 개오할 때와 더불어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한 줄기 활구 소식이 부딪히는 곳마다 분명했다(한암의 네 번째 깨달음, 확철대오).
그리하여 ‘아!’ 하고는 다음과 같은 연구(聯句)의 게송을 읊었다.
하지만 당시는 말세인지라 불법이 매우 쇠미하여 명안종사의 인증(印證)을 받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리고 화상께서도 머리를 기르고 유생의 옷을 입고서 갑산, 강계 등지를 왔다 갔다 하다가 이 해(1912)에 입적하시니 참으로 탄식할 만한 일이다.
그래서 이 한 토막 글을 써서 스스로 꾸짖고 스스로 맹서하노니 한 소식 분명하기를 기약하노라.
돌!
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부엌에서 불붙이다 홀연히 눈이 열렸네
이로부터 옛 길(祖師意)은 인연따라 맑았네.
만일 누가 나에게 달마 서래의를 묻는다면
‘바위 아래 흐르는 물, 그 소리 젖지 않는다’ 말하리.
삽살개는 나그네가 수상쩍어 짖어대고
산새는 사람을 조롱하듯 우짖고 있네.
만고의 빛 마음 달이여
하루 아침에 번뇌망상 쓸어 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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