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한 염불로 정토에서 다시 만납시다.
청담스님이 옛 아내에게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그 동안 염불공부 잘하셔서 죽을 때에 귀신한테 끌려서 삼악도로 가지 아니하고 극락세계의 아미타불님 회상으로 가실 자신이 섰습니까?
모진 병 앓고 똥이나 싸버리고 정신없이 잡귀신들에게 끌려가서 무주고혼이 되어서 밤낮으로 울고 천만겁으로 돌아다니면서 물 한 그릇도 못 얻어먹는 불쌍한 도가비 귀신이나 면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다 늙어서 서산에 걸린 해와 같이 금방 쏙 넘어가게 될 형편이 아닙니까? 살림걱정, 아이들 걱정 이 걱정 저 걱정 다 해봐야 보살에게는 쓸데없는 헛걱정이오, 죄업만 두터워질 뿐이니 다 제쳐놓고 염불공부나 부지런히 하시오. 앞날이 급했지 않습니까?
내나 보살이나 얼마 안 있어 우리들이 다 죽어서 업을 따라서 제각기 뿔뿔이 흩어지고 말 것이 아닙니까?
부디 쓸데없는 망상은 다 버리시고 염불만 부지런히 하셔야 하지요. 곧 떠나게 된 인간들이 제 늙은 줄도 모르고 망상만 피우고 업만 지으면 만겁의 고생을 어찌 다 감당할 것이오?
극락세계만 가놓으면 우리가 만날 사람은 다 만날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다 집어치우고 자나 깨나 나무아미타불, 급했습니다. 부탁입니다. 절하고 빕니다.
늙은 중 합장
조계종 통합종단 초대 총무원장과 종정을 지내며 청정 승단의 재건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던 청담 순호(靑潭淳浩, 1902~1971). 1954년 식민지 불교의 청산을 기치로 본격화된 정화운동 중심에는 그가 있었고, 전혀 불가능해 보이던 역사의 물줄기를 뒤바꾼 것도 법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던 청담의 위법망구(爲法忘軀)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잇따른 승려대회를 비롯해 데모와 할복사건, 유혈충돌, 법정투쟁 등 숱한 희생과 우여곡절. 그 속에서 종단의 총책임을 맡고 있는 청담은 숨 돌릴 틈 없이 바쁜 와중에도 문득문득 옛 아내를 떠올리고는 했다. 남편과 막내딸을 불문(佛門)으로 떠나보내고 온갖 번민과 근심을 끓이고 산다는 그녀의 소식을 접할 때면 팔만사천 번뇌를 여의었다는 청담조차 모래 위에 부어진 물처럼 아픔이 가슴 속 깊이 스며들었다. 자물쇠도 열쇠도 없는 마음의 감옥에 갇혀 괴로워할 그녀가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젊은 날 진주 호국사에서 벌컥벌컥 물을 들이키는 그에게 ‘목마름이야 물로 다스릴 수 있지만 마음이 탈 때에는 무엇으로 끌 수 있느냐’는 한 노스님의 말을 듣고 시작된 출가에의 의지. 대를 이어야할 2대 독자가 삭발출가하려 하자 아버지는 서둘러 그를 혼인시켰고, 청담과 차점이(1905~1988)와의 인연도 이렇게 시작됐다.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넉넉지 못한 농가로 시집와 소처럼 일하고 양처럼 순종했던 여인. 자신이 백양사로 해인사로 구름처럼 떠돌 때에도 그저 지켜만 보고, 일본에서 출가자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했을 때도 그저 고개만 끄덕이던 착한 여인. 고성 옥천사로 출가한 청담이 고향을 찾아가 이혼수속 얘기를 꺼냈을 때 그렁그렁 고인 눈물이 아내의 야윈 뺨을 타고 흘러내리던 모습을 그는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기왕지사 출가했으믄 스님다운 스님이 되셔야지예. 지야 뭐, 당신이 하자는대로 해드리겠심니더.”
1930년 봄, 고향 낙성법회에 법문 왔다가 죽자 사자 매달리는 어머니에 이끌려 다시 찾은 고향집. 마지막 소원이라며 “가문 이을 씨앗 하나만 심어 놓고 가라”는 어머니의 한 맺힌 절규에 청담은 목건련을 떠올리며 ‘불쌍한 어머니, 저 분을 위해서라면 지옥엔들 가지 못하랴.’라고 마음을 굳혔다. 동시에 아들을 낳지 못해 주변의 핍박과 자괴감에 두고두고 시달릴 젊은 아내에게 옛 지아비로서 마지막 의무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하룻밤의 파계. 첫 닭이 울기도 전 버선도 신지 않은 채 속가를 뛰쳐나온 그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아! 수행자인 내가…. 수미산 같은 이 죄업을 어찌 다 씻을고.’ 가혹하리만치 매서운 청담의 참회와 인욕수행이 시작된 것도 이 때부터다. 홑옷에 맨발 차림. 청담의 눈물겹도록 처절한 만행은 덕숭산, 오대산, 설악산, 묘향산을 거쳐 북간도로까지 이어졌다. 여윈 볼을 할퀴고 지나가는 칼바람에도,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을 때도 늘 맨발이었다. 살은 얼어 찢겨나가고 발은 쩍쩍 갈라져 피가 솟았다. ‘눈 위에 피 묻은 발자국이 있으면 청담 스님이 다녀간 자리’라는 말이 수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늙은 홀어머니와 아내를 두고 출가의 길은 선택한 청담은 가족들의 고통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다그쳐 피나는 정진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청담이 서른 넷 이른 나이에 묘향산 설령대에서 오도송을 부를 수 있었던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모든 부처와 조사는 어리석기 그지없어
어찌 현학의 이치를 깨우쳤으랴.
만약 누가 나에게 한 소식 한 바를 묻는다면
길가에 서 있는 고탑이 서쪽으로 기울었다 하리라.
오랫동안 괴롭혀오던 마음의 갈증이 해갈된 청담. 하지만 이 무렵 그에게 들려온 속가의 얘기는 그를 안타깝게 했다. 옛 아내가 또 딸아이를 낳았으며, 이로 인해 시어머니로부터 혹독한 시집살이를 당하고 있다는 것. 청담은 어머니가 더 이상 죄업을 지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늙은 홀어머니를 직지사 서전암으로 모셔와 출가토록 했다. ‘아들 스님’의 당부대로 비구니 성인(性仁)은 묵은 한을 내려놓고 열심히 염불정진 했다. 훗날 어머니가 임종을 얼마 앞두고 며느리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으며, 며느리도 사찰에 머물며 임종 때까지 시어머니를 돌봤다는 얘기를 들은 청담은 슬픔에 앞서 두 여인의 화해에 안도의 한 숨부터 먼저 내쉬었다.
청담과 차점이가 다시 만난 건 몇 해 뒤인 1943년 여름. 복천암에서 생식을 하며 안거수행을 하던 청담은 사월초파일날 상주경찰서로 연행됐다. 잦아들지 않는 독립운동에 골머리를 앓던 일제는 기미년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청담이 북간도에 간 이유를 집요하게 추궁했고, 법(法)을 찾아 수월을 만나러 갔다는 그의 항변에도 연일 모진 고문을 가했다. 인욕제일 청담이건만 두 달여 계속된 잔학한 고문에 결국 실신했고, 피투성이가 된 채 사경을 헤매야 했다. 이 때 멀리 진주에서 이 소식을 듣고 맨 먼저 달려온 이가 차점이였다.
“시님, 시님…. 이게 뭔 일이란 말입니꺼.”
낡고 찢긴 옷에 피골이 상접한 청담의 모습에 차점이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녀는 마지막 남아있던 땅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청담을 경찰서에서 빼내 상주포교당으로 옮겼다. 차점이는 청담의 곁에 머물며 24시간 지극정성으로 병구완을 했다. 회복될 것 같지 않던 청담의 병세는 하루가 다르게 나아졌고 조금씩 거동도 가능해졌다. 청담은 희끗희끗 흰머리가 돋기 시작한 옛 아내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성껏 들려주었다. 차점이는 무뚝뚝하기만 하던 그에게서 처음으로 따뜻함이 느껴져 왔다. 지아비가 아니라도 좋았다. 그냥 이렇게 세월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남편이 아니라 바람과 구름이 되어 떠도는 수행자였다. 몸을 추스릴 수 있게 되자 청담은 또다시 운수행각에 나섰고, 차점이는 그런 청담에게 한 땀 한 땀 정성껏 만든 바랑을 조심스레 건넸다.
“남을 즐겁게 하는 것이 보살이요,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보살이요, 남을 살리는 것이 보살입니다. 좋은 일 많이 하시고 염불도 지극정성으로 하도록 해요.”
“예, 시님…. 알겠심니더.”
다시 몇 해가 흘러 일제의 탄압이 극도에 이른 1945년 초, 청담은 차점이로부터 편지 한통을 받았다. 젊은 남자는 징용으로, 처녀는 정신대로 끌고 가고 있으니 둘째 딸을 데려다가 스님으로 만들어달라는 부탁이었다. 파계를 해가며 까지 나은 아이, 청담은 어쩌면 이 또한 숙세부터 이어져온 불연(佛緣)이라는 생각에 절친한 도반 성철의 도움을 얻어 머리를 깎도록 했다.
그러나 차점이는 막상 자신의 뜻대로 딸이 출가했건만 어린 딸이 절 생활은 잘 하는지, 건강은 괜찮은지 한시도 걱정이 끊이질 않았다. 딸 묘엄이 조선 최고의 강백이라는 운허의 문하에서 공부할 때도, 뒤늦게 동국대에 입학했을 때도, 청도 운문사로 내려가 강원을 개설해 학인들을 가르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차점이는 수시로 딸이 있는 곳을 찾았고 청담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면서도 늘 안타깝기만 했다. 청담은 절을 찾아 온 차점이에게 대도성(大道性)이라는 법명을 주고 걱정과 욕심을 내려놓을 것을 당부했지만 소용없었다.
조계종 종정직을 사퇴한 이듬해인 1968년, 청담은 옛 아내에게 간절한 편지를 띄웠다. 이제는 이런 저런 근심걱정 다 접어놓고 자신의 업장이나 닦으라고, 그래서 훗날 정토에서 다시 만나자고….
1971년 11월 15일 청담이 홀연히 열반에 들자 대도성은 자신의 삶을 지탱했던 대들보가 무너지는 듯했다. 십수 년 간 조석으로 기도하고 염불도 했건만 가슴 한 켠에 구멍이 숭숭 뚫린 것 같은 허전함은 어찌할 수 없었다. 몇 해 뒤 보다 못한 묘엄은 대도성을 절로 모셔와 손수 머리를 깎아 출가토록 한 뒤 대도(大道)라는 법명과 함께 스님으로서 생활할 수 있도록 했다.
대도는 절에서 생활하며 옛 남편의 뜻을 따라 염불과 경전독송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면서 ‘세상사가 꿈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다’던 청담의 말을 비로소 가슴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1988년 5월 12일 마침내 대도는 고단한 삶의 여정을 접고 무정했던 남편, 인자했던 삶의 스승 청담이 있는 아미타불 회상으로의 마지막 여행을 위해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mitra@beopbo.com
※청담 스님이 대도성 보살님께 보낸 편지는 현재 서울 도선사 청담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그러나 편지에 날짜가 기록돼 있지 않아 청담 스님이 정확히 언제 보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당시 대도성 보살님과 같이 생활했던 손자인 부산대 철학과 김용환 교수는 1968년에 할머니가 청담 스님으로부터 그 편지를 받았다고 밝혔으며, 편지의 내용으로 미뤄보더라도 그 무렵일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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