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업 때문은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연기적으로 생겼다 소멸됩니다.
연기緣起는 글자 뜻대로 ‘조건’ 따라 ‘일어난다’는 뜻인데,
초기불교에서는 그 조건을 스물네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업은 스물네 가지 조건 중 하나이고,
그 외에 스물세 가지 조건이 더 있다는 말입니다.
업이 조건의 전부가 아닌 것입니다.
모든 것이 업 때문이라면
내가 손을 뻗어 컵을 들고 물을 마시는 사소한 행위 하나까지
모두 전생의 업 때문에 일어난다고 해야 됩니다.
그런데 컵을 들고 물을 마시는 것은 내가 의도를 일으켜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
전생의 업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갑자기 고함을 지르면 저 사람이 왜 저렇게 소리를 지르나 싶어
화가 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화를 내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고함소리에 대한 어리석은 주의력 때문이지 업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조건이 형성되지 않으면 업력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업을 지었지만 그 과보를 가져올 조건을 만나지 못해 업의 효력이 소멸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번 생에 결과를 생산할 업이 적당한 조건을 만나지 못한 채 이번 생이 끝나면 효력을 상실한 업이 됩니다. 다음 생에 결과를 생산할 업이 조건을 만나지 못한 채 다음 생이 끝나면 효력을 상실한 업이 됩니다. 세 번째 생부터 아라한이 되는 생까지 결과를 생산할 업은 아라한이 되어 열반에 들면 자신의 결과를 생산할 조건을 만나지 못하므로 효력을 상실한 업이 됩니다. 이처럼 효력을 상실한 업은 자신의 과보를 생산할 기회를 만나지 못한 업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앙굴리마라는 부처님 당시에 사람을 999명 죽이는 불선업을 지었지만 출가해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아라한은 더 이상 윤회하지 않으므로 그 생에 받아야 할 과보는 받게 되지만 다음 생부터 받아야 할 과보는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때 과보를 생산할 업은 효력을 상실한 업이 됩니다.
《초기 불교에서 아뢰야식을 설정하지 않은 이유》
업력은 씨앗이 가진 잠재력과 같습니다. 씨앗의 잠재력이 적당한 토양·햇볕·물 등의 조건이 갖추어지면 열매라는 결과를 맺습니다. 하지만 씨앗이 가진 잠재력이 씨앗 속의 어디에 저장되어 있다가 결과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씨앗이 가진 가능성이 적당한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열매를 맺은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행한 모든 업이 잠재력인 업력으로 남아있다가 조건이 형성되기만 하면 언제라도 결과가 일어난다는 초기불교의 설명과 업종자가 아뢰야식에 저장되었다가 어떤 조건이 형성되면 결과가 일어난다고 하는 유식학의 설명은 근본적인 측면에서 보면 아주 다른 이야기는 아닙니다. 어쩌면 유식학에서 설명하는 것이 더 이해하기 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불교에서 업의 잠재력인 업력이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다가 결과를 맺는 것으로 설명하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유식학처럼 아뢰야식을 설정하게 되면 아뢰야식을 고정 불변하는 실체인 것처럼 착각해서 오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있다는 유신견有身見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초기 불교에서는 아뢰야식을 설정하지 않고 조건으로 업과 업의 결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보통 유식학에서 이야기하는 아뢰야식이 마음 밑바탕에서 계속 흘러가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아뢰야식이 밑바탕에 바다처럼 항상 있고 거기서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인 전오식과 제육식의 의식, 제칠식인 말나식이 파도처럼 일어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유식학에서 말하는 아뢰야식도 찰나생 찰나멸입니다. 의식은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그 밑바탕에 아뢰야식이 끊이지 않고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뢰야식도 일어났다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래 유식에서 이야기하는 것인데 그렇게 바르게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 거 같습니다.
《분별이나 집착이 있으면 업으로 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의도’를 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앙굿따라 니까야”의 ‘꿰뚫는 경’에 보면
‘나는 의도를 업이라고 말한다. 몸과 말과 마음으로 업을 짓는다’고 나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업은 선한 마음이나 불선한 마음의 의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업이 되는 마음은 선한 마음과 불선한 마음입니다.
선한 마음이나 불선한 마음은 다른 마음에 비해서 힘이 강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대상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한번 쳐다보는 것은
강한 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대상을 보고 좋다거나 싫다는 생각을 일으키거나
또는 그것에 대해 집착하면 그 마음의 힘은 아주 강력합니다.
이런 마음은 일어났다 사라진 후에도 다음에 일어나는 마음에 영향을 줍니다.
《업의 종류에 따라 결과를 생산하는 순서》
* 무거운 업 → 임종 가까이 지은 업 → 습관적인 업 → 이미 지은 업
(1) 무거운 업 : 내생에 아주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업.
선업으로는 선정의 마음, 불선업으로는 오역죄五逆罪(오무간업)
(2) 임종 가까이 지은 업
"청정도론淸淨道論”에서는 마음의 힘으로 보면 습관적으로 지은 업이 죽음직전에 지은 업보다 더 강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과를 생산하는 순서로 보면 죽음 직전에 지은 업이 습관적으로 지은 업보다 자신의 과보를 먼저 생산하기가 쉽습니다. 마치 문에 가까이 서 있는 힘없는 소가 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힘센 소보다 밖으로 나오기 쉬운 것과 같습니다.
〈임종 시에 십념왕생(十念往生) 하려면〉
죽기 직전에 일어나는 마음은 매우 중요합니다.
죽기 전에 염불을 열 번하면 극락세계에 간다는 말도
임종 가까이 지은 업이 중요하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죽기 전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죽을 수 있다면
악처에 떨어질 가능성을 별로 없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항상 깨어 있는 수행을 하는 습관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평소에 수행을 잘했으면 혹시 죽기 전에 악처에 떨어질 징조가 나타나더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 빨리 선업을 기억해 내면 악처에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죽음 직전에 자기가 지은 선업을 떠올리면 선한 마음이 일어나게 되고,
태어날 곳이 선처로 바뀔 수 있다는 겁니다.
출처: 윤회와 행복한 죽음(일묵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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