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혜암 성관선사 이야기

炤賢 2016. 12. 6. 23:48

 

일반 신도들에게 법문을 할 때는 '아미타불'을 염하고 나서 법문을 시작합니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을 한번 부르면 나고 죽는 큰 죄, 팔백겁의 죄를 녹여 버리는 공덕이 생깁니다. 
 
나무아미타불을 한번 부른 공덕이 이러할진데 참선의 공덕은 말할 것도 없지요. 
 
자업자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게 생기는 좋은 일, 나쁜 일 모두가 자신으로부터 비롯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이 말의 의미를 잊고 사는 것 같아요. 모두가 남의 탓만 하고 있어요. 
 
이는 죄 받을 일, 죽을 일을 만드는 것과 똑 같습니다. 모두가 '내 놀음'입니다. 
 
내 마음, 내 공로만큼 받는 것이지 가만 있는데 부처님이 복을 지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매일 세끼 밥을 꼭 챙겨 먹으면서도 법문을 듣는 것에는 게으릅니다. 
 
법문을 듣고 앉아 있으면 다 아는 얘기 같거든요. 그러나 행이 따르지 않는 앎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성불하기 전까지는 알고 있는 내용이라도 법문을 밥먹듯이 듣고 이를 부지런히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법문을 수없이 들어도 돌아서면 잊어 버리는게 우리 중생들이예요. 
 
아무 일도 없으면 심심해서 무슨 일이라도 일을 만듭니다. 
 
일이 없으면 공연히 걱정스럽고, 또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것이 모두 헛 것인데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죄지을 일을 만들어 냅니다. 
 
육근(六根)이 무사할 때 다시 말해서 여섯 도둑놈이 일이 없을 때가 제일 좋은 때인데 사람들이 그걸 몰라요. 
 
그래서 귀 도둑놈, 눈 도둑놈, 코 도둑놈을 만들어 지옥에 가는 일을 만드는 판국입니다. 
 
이래가지고도 도를 닦지 않는다면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눈 밝은 이가 보면 고생길이나 죽을 길만 일부러 찾아 다니는 것과 같아서 안타까워요. 
 
천지의 은혜보다 귀중한 것이 불·법·승 삼보입니다. 
 
성불할 때까지 이 삼보에 의지해서 쉼없이 정진해야 합니다. 
 
좋은 법문을 들으면 그 자리에서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말입니다. 

'일주일만에 꼭 도를 깨치겠으며, 그러지 못할 때는 죽어도 좋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환적굴을 찾지 못하고 대신에 다른 새로운 굴에서 '깨달음의 공부'에 들어갔습니다. 
 
굴속에서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육일을 지내고 나니, 귀가 바글바글 울리고 손발 마디마다 빡빡하더군요. 
 
그렇게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정진하하면서 지금까지 사십년 '장좌불와'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장좌불와를 하게된 동기는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그저 '일주일만에 도를 깨치겠다'고 마음먹고 매주 한 주일을 새로 시작하고 하다보니 어느새 사십년을 계속해 장좌불와를 하게 되었을 뿐인게지요.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座臥 語默動靜)에 걸림없는 공부를 해야 됩니다. 
 
공부는 오래하고 있는 것보다 일도양단해서 간절히 할 때에 힘을 얻고 덕을 보는 것이지, 그저 오래 한다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또 아무리 더 없을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해도 '내 마음'을 몰라가지고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물질이 풍부하든 그렇지 못하든 내 본 마음을 모른다면 귀신이 중간에 끼어들어 속이고 다니며 죽을 길로 끌고 갑니다. 
 
어느때 어느 곳에서도 나의 주체성을 잃지 않고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이것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일입니다. 
 
옛 도인의 말씀에, 태어나면 소금장사밖에 할 일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행복은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 조금치라도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엉뚱한 곳에 가서 행복을 찾으려고 야단이니 큰일입니다. 
 
어서 빨리 자신의 마음 찾는 공부를 해야지요. 
 
우리가 끌고 다니는 이몸은 길가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줍듯이 주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몸뚱이는 분명히 나의 것이면서도 내 것이 아닙니다. 
 
이 몸을 천번, 만번 소중히해 다시 태어나도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살아 보아야 괴롭기만 하지, 뭐 좋은 일이 있습니까. 
 
밥먹고, 세수하고, 화장실가고, 남을 돕거나 해치는 일, 뭐 그런거지, 그밖에 다른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길에서 몸을 주웠듯이 몸보다 더 중요한 불법을 만나야 합니다. 
 
내 마음 속에 보물이 있는데 엉뚱하게 밖에서 구하려고 하니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콧구멍 속에 시방세계가 들어 있고, 귓구멍 속에 한량없는 부처님 나라가 다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깨치고 보면 시방세계가 모두 나로부터 나오고, 하늘과 땅, 해와 달 역시 내가 만들어 낸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내 마음 자리에서 보면 수없이 스러졌다 일어서는 바다의 파도만도 못한 것입니다. 
 
경전에 있는 말을 바로 알아야지 행여 짐작으로 안다면, 이는 크게 어긋나는 일입니다. 
 
도는 모양이 없는 것이어서 물건과 같이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천 분이 나타나신다 해도 나의 일은 모릅니다. 
 
자기 마음은 오로지 자기가 깨달아 써 먹어야지요. 
 
팔만대장경을 다 왼다고 하더라도 '이 뭐꼬?' 하며 참선하는 사람을 당하지 못합니다. 
 
도라는 것은 오직 내가 깨닫는 것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는 말이며 참선보다 더 큰 기도는 없습니다. 
 
참선은 곧 활구(活句)요, 정법이요, 부처입니다. 
 
도 앞에서는 부처라는 글자도 보잘 것 없습니다. 
 
부처의 불(佛)자를 몰라도 부처님이 참선을 해서 부처가 되었다는, 이 뜻을 아는 사람은 그대로 '살 길'을 만난 겁니다. 
 
사람의 몸을 받았으니 참선 공부를 해 볼만하지 않습니까?

 

출처 : 자성불 https://story.kakao.com/ch/jsb78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