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산행원 대종사


이 세상의 인과관계는 아주 명확해서 도처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원인과 결과로 설명할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이란 산스크리트로 ‘카르마’ (karma)라고 하는데, ‘행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업은 어떤 특별한 개념이 아니다. 무언가를 만들면 그의 대한 무언가를 얻게 되고 그래서 얻게 된 것들로 인해 장애를 받게 되는 것이다.
업의 결과는 이생에서 그리고 다음 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나쁜 짓을 하면 그 사람은 당신을 싫어할 것이다. 그들 친구들 역시 당신이 그에게 나쁜 짓을 한 것을 들었기 때문에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수도 있다.

그들은 당신에게 나쁜 감정을 가질 것이고 그러면 당신은 고통을 겪을 것이다.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생각, 말, 행동을 통해 뿌려진 어떤 업의 씨앗이 열매로 익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누구에게 어떻게 잘못했는지 기억을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의 삶이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운지 모르지만 이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아주 친숙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러 번 만났는데도 늘 스쳐 지나가듯 어색한 사람도 있다. 우연처럼 보이는 일도 모두 원인이 있다.
길 가다가 다른 차와 부딪혀서 다리가 부러졌다고 하면, 불교적 관점에서는 이런 것들 모두가 그냥 우연히 생기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다. 당신과 그 사람 사이에 있었던 어떤 전생의 업의 결과이다. 물론 이생에 뿌려진 것일 수도 있다.

아주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여기 갑, 을 두 사람이 있다고 하자. 갑이라는 사람은 현생에서 열 개의 좋은일을 했다. 가난한 사람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아픈 사람들을 돌보고 스님들에게도 좋은 일을 많이 했다.

이 같은 행동은 아주 좋은 업을 만든다. 아마 이 사람은 이생에서 혹은 다음 생에서 이런 여러 개의 좋은 행동들에 대한 선과善果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만약 현생에서 다섯 개의 선과만을 받았다고 치자. 그리고 또 현생에서 다섯 개의 나쁜 행동을 했다고 하자. 그리고 나쁜 병에 걸리거나 아주 극복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는 세 개의 불행을 겪는다고 하자.

열 개의 좋은 행동을 행하여 받을 열 개의 복이 다섯 개의 나쁜 행동으로 이제 다섯 개의 복으로 줄었다.
그런데 세 개의 불행은 이미 겪었으므로 그는 두 개의 복을 누릴 수 있다. 그러면 죽을 때 이 두 개의 복이 이 사람의 삶을 좀더 복되게 환생시킬 수 있는 것이다.
윤회의 여섯 가지 형태에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영역을 0에서 +10까지라고 가정할 때 이 사람은 현생에서 +2이므로 비록 그가 인간으로 환생한다 해도 그리 좋은 조건은 아닐 것이다.
가난하게 태어날 수도 있고 어떤 고통에 휩싸일 수도 있다.
이러한 예는 아주 간단하게 ‘업’이라는 것, 삶에서 행한 인과관계라는 것이 어떻게 전생과 현생, 그리고 내생과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우리가 업을 만드는 한 계속된다.
이제 을이라는 사람을 보자. 을은 현생에서 아주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살아 있는 동안 열다섯 개나 복을 지었다.
그러나 전생에 이미 삼십 개의 나쁜 업을 지었던 터라 현생에서 착한 일을 많이 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해도 그의 나쁜 ‘업’은 언제나 강력하게 그를 끌어당겨 사람들에게 쉽게 화를 낸다든지 사람들과 자주 다툰다든지 한다. 우리는 주변에서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쉽게 발견한다.
성격도 나쁘고 별로 착한 일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무 걱정 없이 사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마음씨 곱고 착한사람들이 고통을 많이 겪는 경우도 본다. 이것은 모두 이전 생의 결과이다.
어떤 사람들은 별로 착하게 사는 것 같지 않은데도 항상 좋은 직업, 좋은 집에 많은 돈을 번다. 그는 한동안 늘 좋은 상황에만 놓인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그가 전생에 지었던 좋은 업이 무르익어 현생에서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그가 현생에서 짓는 나쁜 업은 아직 무르익지 않은 것이다. 이것을 좀더 쉽게 설명해 보자.
가령 어떤 사람이 좋은 일을 몇 가지하였는데 지금 생에 다섯 가지를 받고 다섯 가지가 남아 있다고 가정하자.
또 나쁜 일을 다섯 가지 한 가운데 세 가지를 받고 두 가지가 남아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에겐 다음과 같은 업보 계산이 나온다.

(+10)-(+5)=(+5)

(-5)-(-3)=(-2)

천상, 아수라, 인간, 축생, 아귀, 지옥 등 육도 중에서 천상은 선행이 20 이상 되는 자가 나는 세계이고, 아수라는 선행이 10 이상 되는 자가 나는 세계이며, 인간은 선악의 중간, 즉 0지대이고, 축생은 악이 10, 아귀는 악이 20, 지옥은 악이 30 이하 되는 사람이 태어나는 곳이다.
그러므로 앞사람은 겨우 사람으로 태어나되 하류층의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고, 두 번째 사람은 축생으로 나되 하류층의 축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하나면 하나, 둘이면 둘이 분명하여 눈썹 하나 속일 수 없는 것이 인과이다.
인간이나 소, 돼지 같은 것은 태어날 때 그의 습관을 따라 태를 빌려나고(胎生), 새나 뱀 같은 것은 알로 태어나며(卵生), 박테리아 같은 것은 습으로 나고(濕生), 도깨비 같은 것은 변화하여 난다(化生).
그러므로 세상에 태어나는 자는 무엇보다도 업이 중요하다. 대자대비의 보살 업을 지으면 보살로 태어나고, 선업을 쌓으면 복업을 받고, 악업을 지으면 고통을 받되 계속 같은 업을 반복하여 쌓으면 하나의 소질(素質)이 형성되어 습관을 이룬다.

나면서부터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 운동을 즐기는 사람은 다 전생의 소질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소질이 바탕이 되어 연습을 거듭하면 훌륭한 선수가 되는 것이고 천재가 되는 것이다.

적업(積業)으로 소질을 쌓아가면서도 같은 업을 지은 사람들끼리 서로 통하면 동업(同業)이 되어가고 오는 길을 같이하게 되므로 같은 가족, 형제, 부모, 일가친척, 고향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아주 낯선 사람이 되는 것이다.

외국에 와서도 금방 사귀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깝게 있으면서도 잘 사귀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
하나의 씨앗이 연을 따라 일어나면 결과는 그 가풍을 따라 저절로 수확하게 된다. 그러므로 만상(萬相)은 인연 따라 나서 인연 따라 멸한다. 마음이 나면 곧 법이 생기고 법이 나면 고로 모양이 생기며, 모양이 생기면 고생을 자초한다.

마음이 멸하면 법이 멸하고 법이 멸하면 모양 또한 멸한다. 모양이 멸하면 고통 또한 멸하는 것이니 일체의 모든 것은 마음으로 짓고 마음으로 받는다.
그러나 본래 업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단지 이해를 돕고 가르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업이란 오로지 생각과 욕심에서 비롯된다. 생각하면 업을 만들고 업은 우리를 지배한다. 그러나 생각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끊으면 어떤 업도 생겨나지 않는다.

“업은 무릇 모두 마음에서부터 나온다. 마음이 사라지면 업 또한 사라지니 이는 불이 마른 풀을 태우는 것과 같다.”
윤회의 사슬을 끊기 위한 길은 바로 이 순간 마음속에 어떤 것도 만들지 않는 것이다. 한 제자가 나에게 물었다.
“항상 착한 일만 하면 다음 생에 업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좋은 행동과 업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다른 얘기이다. 좋은 행동이 업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착한 행동은 복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이 복 역시 업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이것을 좋은 업이라 부른다.
하지만 좋은 업도 업은 업이다. 업은 여전히 생각에 의해 만들어진다.
생각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것은 언제나 변한다. 그래서 좋은 업은 결국 기한이 다 되면나쁜 업이 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 업을 바꾸기를 원한다면 좋거나 나쁜 것을 만들지 말라. 그것이 올바른 수행이다.
우리 업을 어떻게 하면 다른 중생을 위하는 것으로 쓸 것인가가 중요하다. 만약 우리가 업을 ‘바꾸기’만을 원한다면 그것은 이미 큰 실수이다. 우리는업을 어떻게 올바르게 실천하고 바르게 적용을 해야 하는지를 찾아야만 한다.
이것이 업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들에 집착하지 말라. 업을 바꾸고 업을 벗어버리는 것 역시 똑같다. 단지 말이 다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수행을 바로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제8식, 즉 의식의 저장고가 있다. 그리고 이 의식의 창고 뒤에는 제9식이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참 본질, 순수한 본성이다. 이 본성을 얻으면 우리는 우리의 업을 바꿀 수 있다.
이것은 오로지 강한 수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업은 단지 생각’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것은 완벽하게 공허하다.
우리가 수행을 열심히 해서 밝고 참된 본성을 찾게 됨에 따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 좋고 나쁨을 만들지 않으면 곧 맑아질 것이다. 우리의 본래 면목이 무엇이냐, 본래 실체가 무엇이냐?
부처님도, 하나님도 대신 대답해 줄 수 없다. 오직 참선 수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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